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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56
한자 朝鮮時代敎育-産室光州鄕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 105번길 5[구동 2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희태

[정의]

조선시대 광주목에 설치한 공립 교육기관인 광주향교의 연혁과 현황.

[개설]

광주향교는 조선시대 광주목에 설치한 공립 교육기관이다. 1985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향교의 창건과 세 번의 이건]

광주향교를 처음 세운 연대는 자료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조선 태조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태조 때 각 고을에 흥학교령을 반포하고 안찰사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 수령들을 고과하는 법을 삼도록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광주향교는 처음에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었으나 호환(虎患)이 잦아서 성안[동문 안]으로 옮겼다. 그런데 성안 저자거리로 향교를 옮기자 시정의 소란스러움에 학교의 풍취를 잃었고, 지대가 낮아 홍수의 피해를 입게 되어 권수평(權守平) 현감이 서쪽 2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현 자리 부근에는 원래 광산탁씨 집안의 조역(兆域)이 있었다. 김영한(金甯漢)[1878~1950]이 지은 탁신(卓愼)[1367~1426]의 신도비문에 “광주(光州) 사촌(社村) 왼편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뒤에 교궁을 영건하려는데 조역이 가깝다하여 당부면(當夫面) 유목동(柳木洞)으로 옮겼다"[『문헌록』, 영광향교, 2016]”는 기록이 있다. 탁신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좌찬성을 지냈다. 광산탁씨는 광주 토성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된 성씨이다.

[수령 권수평의 향교부흥과 향민 교화

권수평은 부임하여 고을의 폐단을 없애고 적체된 옥사를 처리하면서 민생을 살폈다. 특히 성안에 있던 향교의 부흥에 노력하는 등 교육과 교화에 앞장섰다. 광주 지역은 당시 광산으로 불렸고 읍격은 현이었다. 판관 우윤공이 부민이 쏜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이 무렵 부임해 온 권수평 현감은 향민 교화에 그만큼 힘을 다한 것이다.

성현(1439~1504)은 『허백당집』권4 「광산향교중수기」에서 권수평의 치적을 소개하고 있다. 성안에 있던 옛 향교는 지대가 낮고 좁았으며 건물이 기울고 낡아 강학의 장소로 적당치 않기에 고을 부로(父老)들과 상의해 성의 서쪽에 터를 잡고 학교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수평의 노력에 많은 백성들이 감동하여 협력하였는데, 특히 향교 재정을 위하여 권수평이 사재를 출연하였던 것을 귀감으로 삼았다.

권수평은 향교 앞 백성의 땅을 사들여 논과 채마밭을 만들거나 향교 소속 노비들의 집을 마련하였으며, 또 백성들의 밭을 사서 반은 향교에 기부하고, 반은 사마재에 주어 재정의 바탕으로 삼게 하였다. 또 세금으로 들어온 면포 백필, 쌀 백석, 콩 이십석을 향교 교생들의 비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생들의 면학을 위하여 사서, 오경,제자서,운서 등을 마련하여 열람하게 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물적 지원은 감사와 도사(都事)들도 참가하였는데, 감영에 있는 무명 40여 필, 조세 곡식 50여석을 광주향교에 지원해 주었다.

권수평 현감의 향교에 대한 재정 지원은 모범 사례가 되어 정약용도 목민심서 「예전」의 흥학조에 권수평의 일화를 인용하여 소개한 뒤 "이로 인하여 유학의 풍교가 크게 진작되고, 유학의 가르침이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향교의 재장(齋長)으로 삼고 사표가 되어 교생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교생들을 예의로서 대우하여 향촌민들이 예의염치를 알도록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유교적 이상사회 실현을 기대 - 기대승과 강항의 상량문]

1560년에 유경심(柳景深)이 목사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건하였다. 기대승[1527~1572]은 1563년 「대성전중수상량문」을 지었다. 성현이 1500년에 지은 향교 이건 중수 기록은 향교의 이건 설립 과정에 중점을 두어 수령의 치적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반면에 1563년 기대승의 기록은 수령의 활동보다는 향교로 인해 풍교(風敎)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기대승은 중수된 향교에서 유학적 교화가 크게 일어나 광주 지역에 유교적 이상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마치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읍재(邑宰)로 있던 무성이라는 고을에 갔을 때, 거문고 가락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유가 공자에게 학습한 대로 예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광주에서 예악(禮樂)에 근거한 정치가 이루어져 향촌민의 교화가 이루어지길 고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소실된 뒤, 1600년 목사 이상길이 부임해 전당과 방실을 새로 지었다. 이에 강항(姜沆)[1567~1618]은 광주향교 중수상량문을 지었다. 강항은 광주의 교화는 다른 곳에 견줄 바 없는 수준으로 높고, 선비들은 중국 유학 천년의 전통을 터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지금도 유학의 도를 의논하는 생원 수가 대폭 늘어날 정도라고 하였다. 광주는 조선의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인걸들이 태어났으니, 이는 산천의 뛰어남과 아름다움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학의 효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즉 향교에서의 유교적 교육-교화로 유교적 이상사회 실현을 기대한 것이다.

1804년 목사 김선(金銑)[1750~?]에 의해 광주향교가 개수되었다. 고을 제생들이 개수를 요청하자 목사는 봉록을 내어줘 자금을 충당하게 하였으며, 민역(民役)의 수고로움을 피하여 추수가 끝난 10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3월 준공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온 고을 선비들에게 교화의 기회로 삼았다.

기학경(奇學敬)[1741~1809]이 「향교중수기」를 썼는데 기대승의 7대손이다. 기대승광주향교를 통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널리 지역민에게 교육할 것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240년 뒤 기학경은 공자보다는 주자의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는 인재를 교육하는 곳이며, 풍화의 근본이 되는 곳”이라고 규정하고, 유학의 성쇠는 실로 학교의 흥폐에 달려 있다는 인식은 기대승 시기와 같았다.

기학경은 특히 광주는 호남의 중심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굳세고 영특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문예를 좋아하여 그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광주인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광주향교는 도학과 문장의 전통을 형성하고, 지역민에게 충효와 절의의 풍습을 지키게 하여 남방 학문의 정화를 얻게 하는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정조 친제 책문과 어고방의 봉안과 중수]

1797년(정조 21) 겨울 정조는 어정책자(御定冊子)인 『대학연의』, 『대학연의보』, 『주자대전 절약』을 전라도에 보내 그 교정을 유생들에게 맡겼다. 이때 전라감사는 각 고을에 이 일을 맡을 역량 있는 유생들의 추천을 지시했고 추천받은 유생들은 교정에 착수하였다. 교정은 책의 내용을 분석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라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정조 임금에게 보내졌고 여기서 그 능력이 검증된 유생들은 1798년 광주에서 열린 도과(道科) 시험에 응시자격을 부여받았다. 이 일련의 과정은 호남지방 인재를 우대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도과는 시(詩), 부(賦), 전(箋), 의(義), 책(策) 5과목이었고 정조가 직접 출제하였고 채점도 하였다. 69명이 참여해 53명이 입격하였고 16명에게는 서책이나 종이, 먹 등을 하사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고시관이었던 광주목사 서형수가 편액을 만들어 향교 명륜당 상벽에 걸었다. 그리고 정조가 지은 어제책문(御製策文)과 방목인 어고방(御考榜)을 책으로 만들어 명륜당의 들보 위에 봉안하고 봉안각이라 하였다.

1841년(헌종 7) 명륜당과 동서 재실이 불에 타버리는 일이 있었다. 광주목사 조철영(趙徹永)[1777~1853]은 성묘에 관한 일은 늦출 수 없다고 즉시 명을 내려 재물을 모으고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1843년 한 달 남짓 기간에 준공하였는데, 공사 비용은 관급미로 충당하여 고을 백성들에게 분담하는 부담을 넘기지 않았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하여 고을의 장로와 유생을 불러 모아서 향음주례를 시행하여서, 효제의 도리와 강학의 도를 가르쳤으니 이것이야 말로 정치의 근본을 아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다시 『어정대학연의보초본』 부본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1책의 필사본으로 끝에 1798년 서형수 목사의 봉안기(정조 22)와 1841년 조철영 목사의 봉안기가 있다. 당대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명륜당중수기」를 지었다.

1854년(철종 5) 부임한 홍재응(洪在應) 목사는 2월에 중수를 시작해서 5월에 준공하였는데, 전당은 옛 모습을 유지하되 목재는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고 기와와 초석 이외의 모든 것을 새롭게 교체하였다. 목사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주민들에게 재물을 염출하거나 노역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온 고을의 대소 사서인들이 모두들 기뻐하면서 목사의 공적을 칭송하였다.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문묘중수기」를 기록하였다. 광주가 홍재응 목사의 교화를 받아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호남 으뜸의 고을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대성대학 설립을 위한 유림대회 개최]

1947년 12월에 전라남도 각 향교의 대표들은 광주향교에서 유림대회를 열고 대성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인가를 받기 전인 이듬해 3월에 광주향교의 명륜당에서 학생을 모집해 4월에 입학식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3기까지 학생을 선발해 운영하던 중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중단되었다.

1951년 1월에 대성의숙재단 설립을 신청해 8월에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향교가 설립한 대성대학은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사학과, 철학과, 정치학과의 문과 계열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의 이과계열로 출발했는데 뒤에 정치학과에 법학전공이 신설되어 법정학부로 개칭되었다.

1952년 6월에 국립대학으로 전남대학이 설립되자 전남대 문리과대학으로 통합되었다. 향교의 대성대학은 강의실과 운동장이 없어서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도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1951년 9월 14일에 전남대학교설립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대성대학은 전남대가 설립되면 합병하기로 하여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1952년 6월에 국립전남대학교가 출범하자 학생들과 직원들은 국립전남대학교의 문리과대학의 학생과 공무원인 교직원이 되었다. 2016년에 전남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설립되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 배치]

향교는 제사, 강학, 유식, 관리 등의 공간으로 크게 구분한다. 공간 배치는 향교가 있는 곳의 지형과 좌향에 따라 향교마다 다르다. 광주향교는 강학 공간인 강당 명륜당을 앞쪽에 두고,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신실인 대성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가운데에 공자 등 오성을 봉안하고 동서벽에 송조이현과 동국십팔현을 배향하고 있다. 대성전은 전체 축에 따라 남동향이며 앞면 3칸 옆면 3칸의 장방형의 평면에 면적은 26.97㎡이다. 어칸[중앙칸]에 대성전 현판이 걸려 있다. 옆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뒤 반퇴로 앞면 1칸은 툇간[退間]으로 비어 있으며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가구 구성은 앞면에는 출목이 있는 이익공 형식이며 뒷면은 민도리 평식의 5량가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앞면에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 뒷면에는 홑처마를 사용하여 앞면과 뒷면의 처마 구성이 다르다. 동서무는 각 3칸으로 대성전 앞 좌우에 있는데 예전에는 동국18현을 분향하였는데 광복 뒤 폐지되었다. 내삼문은 3칸이다.

명륜당은 앞면 6칸 옆면 3칸의 장방형의 평면에 면적은 26.97㎡이다. 어칸에 명륜당 현판이 걸려 있다. 옆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퇴가 있으며 내부 전체에 우물마루를 두었다. 가구 구성은 1고주 5량과 무고주 5량이 병행된 구조이다. 동재는 3칸으로 명륜당의 오른쪽에 있는데 재임과 유림들이 지숙하는 곳이다. 서재 4칸으로 유생들이 거처한 곳이다. 육영재(育英齋)는 양사재(養士齋)라고도 하는데 1985년에 복원하였다. 문회재(文會齋)는 사마재(司馬齋)라고도 하는데 1987년에 복원하였다. 서재 뒤쪽에 있던 4칸의 전사각(典祀閣), 명륜당 서쪽에 있던 9칸의 노반청(奴班廳) 등은 지금은 없다. 외삼문, 충효문, 홍살문, 비각, 유림회관, 충효교육관이 있다.

[향교 운영과 교육 관련 다양한 기록유산]

광주향교에는 향교 운영이나 교육 강학 관련 다양한 기록유산이 있다. 문서자료로는 유안이 있다. 1619년 고용후의 서문이 있는 광주향좌목 등 향안 2책과 광주교적(校籍) 등 유적안(儒籍案) 9책이다. 교원폐단이정절목(1756년) 1책은 전국의 향교에 반포한 것이다. 광주 사마방목 2책은 광주의 사마안(司馬案)으로 1396년(태조 2) 진사에서부터 시작하여 1846년 병오년까지 등방년, 성명, 본관, 부의 직명, 안항[형제] 인명이 기재되어 있다. 어정대학연의보초본(御定大學衍義補抄本)[1841년 필사] 1책이 있다.

광주향교에서 간행한 책으로는 『광주읍지』와 『호남절의록』도 주목할 만하다.

현판자료는 명륜당에 있는데 1563년(명종 18) 기대승이 지은 대성전상량문, 1603년 수은 강항이 지은 중수상량문, 1841년(헌종 7) 기상춘의 향교 중수기, 1843년(헌종 9) 조인영의 향교중수기 등 26개이다. 비각에는 1563년(명종 18) 기대승이 짓고 박광옥이 음기를 쓴 향교중신기(鄕校重新記), 1803년(순조 3) 기학경의 향교 중수기, 1854년(철종 5) 기정진의 문묘중수기, 1882년(고종 19) 송병옥의 향교중수기 등 9기가 있다.

원래 향교와 관련된 문서이지만, 다른 곳에 소장된 『향교급양사재절목(鄕校及養士齋節目)』도 있다. 1886년(고종 23) 광주향교양사재의 전곡에 대한 수입 지출 기록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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