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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석산기」[정약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937
한자 遊瑞石山記-丁若鏞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62년 - 정약용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36년 - 정약용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78년연표보기 - 정약용 「유서석산기」 지음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기행문
작가 정약용

[정의]

1778년에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서석산(瑞石山)[무등산의 다른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불림]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

[개설]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화순현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 머물던 1778년에 형제들과 무등산을 등반하고 남긴 작품이다. 정약용은 총 60편 이상의 기문을 남겼는데, 그중 유산기가 10여 편이고, 「유서석산기」는 이 중 한 편이다. 『여유당전서』 제1집 13권에 실려 있다.

[구성]

「유서석산기」는 짧은 단편으로 전체 400여 자로 되어 있다.

[내용]

「유서석산기」는 화순에서 출발하여 상봉, 중봉, 규봉을 거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서두에 서석산을 오르게 된 동기를 기록하였다. 정약용서석산을 유람하게 된 것은 전라남도 화순 사람 조익현(曺翊鉉)[1737~1800]의 말 때문이었다. 서석산의 경치를 화순 적벽에 비유하며 극찬하였으므로 정약용은 형제들과 서석산을 유람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조익현은 동생을 보내 서석산을 안내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정약용서석산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서석산이 높고 넓어서 7개 군과 현에 걸쳐 있고, 주변의 산들은 무등산에 비해 어린 자식이나 손자 격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13개의 봉우리와 사당(祠堂), 산의 높이와 산세의 험준함을 들며 가장 훌륭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규봉을 홀(圭)과 방형의 법칙에 알맞다고 그렸다.

[특징]

글의 길이가 짧아서 산의 경치 묘사는 많지 않다. 그러나 화순 적벽과 무등산을 비교하는 대비적 표현과 무등산이 높고 넓어서 산맥이 7개 지역에 걸쳐 있다는 점과 기암절벽 등의 특징적인 면모를 잘 꼽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무등산 유산기는 16세기 고경명(高敬命)「유서석록(遊瑞石錄)」 이후로 오랜 기간 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바로 다음 작품이 18세기 후반에 정약용이 지은 「유서석산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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