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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곡」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852
한자 春山曲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환벽당길 42-2[충효동 397-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민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68년 - 김덕령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596년 - 김덕령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숙종 20년에 왕명에 따라 『김충장공유사』 간행
배경 지역 충장사 -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지도보기
성격 시조
작가 김덕령

[정의]

전라도 광주 지역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이 옥중에서 지었다는 시조.

[개설]

「춘산곡(春山曲)」의 작가는 김덕령(金德齡)[1568~1596]이다. 자는 경수(景樹), 본관 광산(光山),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영남 서부 지역을 지켰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1596]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난이 평정되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 등이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무고하여 최담년·곽재우 등과 같이 체포되고, 20일 동안의 고문으로 결국 옥사하였다. 이후 김덕령은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788년[정조 12]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 벽진서원은 다음 해인 1679년에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현재의 충장사이다.

「춘산곡」김덕령이 20여일 간의 옥살이 중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에 수록되어 있다. 『김충장공유사』는 숙종 때 왕명으로 김덕령의 행록과 시문을 기록하여 편찬하고, 이후 정조 때 재간행한 책이다.

[구성]

「춘산곡」김덕령의 행록과 시문 등을 기록한 『김충장공유사』의 권 1에 실려 있다. 『김충장공유사』의 권 1에는 시 5수, 가 1편, 서(書) 4편, 격문 2편, 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춘산곡」은 그중 하나이다.

[내용]

「춘산곡」은 다음과 같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난다[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들이 다 타는구나.] /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저 산에 일어난 저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업서 하노라[이 몸에는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을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스러워 하노라.]

[특징]

「춘산곡」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권율의 막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영남 서부 지역을 담당하여 큰 활약을 하였으나, 이몽학의 내란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옥사한 김덕령이 옥중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이다. 억울한 심정을 연기 없는 불에 비유하여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 몸속에 붙은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한탄하는 노래이다.

[의의와 평가]

「춘산곡」김덕령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문 중 하나로, 나라를 위해 충정을 바쳤으나 오히려 무고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자신의 처절한 심경을 불로 표현한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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