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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동 소문산마을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41
한자 文興洞小文山-堂山祭
이칭/별칭 문흥동소문산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부유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50년 6.25전쟁 전후 - 문흥동 소문산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소문산마을지도보기
의례 장소 할머니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소문산마을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자정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신당/신체 할아버지당산[소나무]|할머니당산[느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소문산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자정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지냈던 마을 공동 제사.

[개설]

문흥동 소문산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자정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소문산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소문산마을은 문산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마을 가운데 큰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정자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당산제의 시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6.25전쟁을 전후하여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소문산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 있었다. 할아버지당산의 신체는 밑둥이 성인 다섯 명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만큼 커다란 소나무였는데, 8.15해방 이후 큰 바람에 부러진 뒤 고사(枯死)해 버렸다. 할머니당산은 마을 안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이다.

[절차]

문흥동 소문산마을 당산제는 정월 10일 저녁에 마을회의를 열어 헌관 3명, 축관, 화주 3명을 제관(祭官)으로 선정한다. 이들은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이 맞고 궂은 일이 없어야 한다. 제관으로 뽑히면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상가 등 궂은 곳의 출입을 삼가야 한다. 용변 후에는 목욕재계를 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다. 제비(祭費)는 각 호당 거출하는데 이를 '용머리돈'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월 12일에 양동시장에서 부서조기, 북어, 대추, 밤, 곶감, 배, 소고기, 돼지머리, 시루떡, 삼채나물, 초, 향 등의 제물(祭物)을 구입한다. 이때 화주 부부와 이들을 돕는 마을 사람 2명이 동행하는데, 물건값은 절대로 깎는 법이 없고 잡인과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제물을 구입한 뒤 저녁 늦게야 동네에 돌아온다. 제주(祭酒)는 화주의 집에서 준비한 청주를 올리며, 제기(祭器)는 마을 공동 소유의 것을 사용한다. 정월 열사흗날에는 마을 입구, 당산 주변, 화주집을 비롯한 제관집 주변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소복하게 놓아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정월 열나흗날 밤 10시 즈음 제관들이 화주집에 모여서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을 나누어 준비를 마친다. 자정 무렵이 되면 쇠, 징, 북, 장고, 나발, 소고 2명으로 짜여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남자들만 할아버지당산으로 간다. 제사는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데 '진설→인사굿→초헌→개반삽시→풍물→아헌→축문→종헌→소지→풍물→헌식'의 순으로 이어진다. 헌식은 돼지머리를 한지로 싸서 당산 밑에 묻는다. 할아버지당산에서 제를 마치고 닭이 울면 할머니당산으로 향한다. 축문의 일부만 다를 뿐 절차는 할아버지당산과 유사하다. 당산제를 마친 제관들은 7일 동안 바깥 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 7일이 지나면 대문에 두른 금줄을 거두어 당산 밑에 가서 태우고 묻는다.

[축문]

당산제의 축문은 전하지 않으나,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대보름 아침이 되면 화주집에서 마련하였던 제물을 함께 음복하고 당산제를 결산한다. 한해 품삯 등 마을 운영 전반에 관한 회의도 이어간다. 회의를 마치면 화주집에서 풍물을 치고 논다. 다음날부터는 마을 안 샘굿을 시작으로 각 가정을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한다. '문굿→마당굿→조왕굿→천룡굿' 순으로 치며 각 가정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때 거두어진 경비는 마을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현황]

문흥동 소문산마을 당산제는 1924년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부득이 당산제를 한번 중단한 적은 있었으나 그 후 일제의 중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오다, 8.15해방 이후 몇 차례 지낸 뒤 6.25전쟁을 전후하여 중단되었다.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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