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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신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196
한자 湖南新聞
영어공식명칭 Honam Newspaper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광주광역시 서구 운천로 213[치평동 124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은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46년 3월 21일연표보기 - 『호남신문』 창간
창간 시기/일시 2007년 9월 16일 - 『호남신문』 재발행
폐간|종간 시기/일시 1962년 8월 30일 - 『호남신문』 폐간
속간 시기/일시 1951년 12월 10일 - 『호남신문』 속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3월 21일 - 『전남신보』에서 『호남신문』으로 제호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8월 18일 - 『호남신문』 2개월 간 정간 처분을 받음.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제작|간행처 호남신문 - 광주광역시 서구 운천로 213[치평동 1243]지도보기
성격 연속 간행물
관련 인물 이은상|최영욱|유성계|최종섭|김형철|김평호
창간인 이은상|김형철[2007년 재발행 호남신문]
발행인 이은상|김평호[2007년 재발행 호남신문]
판형 대판[39.1×54.5㎝]
총호수 1946년 창간 『호남신문』- 제4783호|2007년 재발행 『호남신문』- 제3249호[2021년 11월 25일 기준]
URL http://www.i-honam.com

[정의]

광주광역시 지역 주민에게 다양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연속 간행물.

[개설]

『호남신문』의 전신은 『전남신보』이다. 『전남신보』는 1945년 8월 31일자로 지령 제1호를 발행한 국한문 병용 일간 신문으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간된 신문이다. 『전남신보』는 과거 일본인들의 신문이었으나 『전남신보』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자들이 전남신보사 자치위원회를 결성하여 『전남신보』를 펴냈다. 『호남신문』은 이를 이어받아 1946년 3월 21일 제호를 변경칭한 것이다. 신문 체제는 타블로이드판 2면제를 유지하다가, 1947년 8월 15일자부터 배대판(倍大版) 4면제 가로쓰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문 세대의 여론에 밀려 1956년 11월부터 다시 국한문 병용 세로쓰기 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위치를 확고히 다져 나갔지만 1962년 8월 30일에 폐간되었다. 이후 2007년 9월 16일에 『호남신문』이 재발행되었다.

[창간 경위]

광주 지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전까지 순수한 지역 신문이 없었다. 1941년 일제가 강제한 '1도(道) 1사(社)'의 언론 정책의 산물로 『전남신보』가 창간되었는데, 이 신문은 일본이 식민지배와 상업적 목적을 위해 발행한 것이었다.

광복 직후 『전남신보』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자들이 일본인들이 남겨 두고 간 인쇄 시설 및 사옥을 인수하고, 『전남신보』라는 제호도 그대로 본따 신문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우파와 좌파의 이념 갈등과 운영과 내용에 대한 미군정과의 갈등 등에 의해 운영권이 박준규에서 이은상(李殷相)으로 넘어가면서 제호도 『호남신문』으로 바뀌었다. 제호를 바꾼 것은 『전남신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이고 지역성을 강하게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형태]

2007년 재발행된 지금의 『호남신문』 대판[39.1×54.5㎝] 규격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발행되며 일 발행 면수는 15~16면이다.

[구성/내용]

지금의 『호남신문』은 종합, 정치면, 지역 소식면, 사회면, 교육면, 경제면, 스포츠면, 방송·연예면, 사람과 생활면, 오피니언, 복지데스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 소식면은 진도·해남·완도·강진·장흥, 영광·함평·무안·목포·영암·신안, 장성·담양·곡성·구례·화순·나주, 순천·여수·광양·고흥·보성으로 각 1면씩 구성된다. 『호남신문』 웹 사이트는 뉴스, 스포츠·연예, 오피니언, 광주, 전남, 복지, 기획, 사람과 생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 신문답게 사람과 생활에서 광주 지역의 다양한 인사·동정·부음 등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변천과 현황]

『전남신보』의 부사장이던 이은상이 『전남신보』의 운영권을 넘겨 받아 1946년 3월 21일 『호남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창간하였다. 1947년 8월 15일자부터 배대판 4면제 가로쓰기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1956년 11월 다시 국한문 병용 세로쓰기 체제로 바뀌었다. 1948년 경영과 제작을 도맡아 왔던 이은상이 물러나고, 전직 지방 관료 최영욱(崔泳旭), 유성계(柳成溪) 등으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호남신문』의 운영권은 6.25전쟁 발발 직전 다시 최종섭(崔鐘涉) 등에게 넘겨졌다. 이후 타블로이드 2면 체제를 배대판으로 키웠고, 활자 크기도 조정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과 함께 운영 전반에 갈등이 제기되는 등 어려움이 따르자 정간하였다가 1951년 12월 10일 복간하였다. 1952년 5월 이은상이 다시 운영권을 인수하여 광주·전남 지역의 동부[장성·담양·곡성·구례 등 9개 지역], 서부[광주·나주·영광·함평·무안 등 11개 지역] 판을 따로 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들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권력 지향적이거나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신문을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들면서 복잡한 내적 갈등을 안게 되었다. 여기에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사회가 위축되어 『호남신문』의 재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1962년 7월 「귀속재산법」에 의한 경매 입찰에서 『전남일보』[광주일보의 전신]에 넘어갔다. 같은 해 8월 30일 지령 제4783호를 끝으로 『호남신문』은 폐간되었고, 그 시설은 『전남일보』로 넘어갔다.

『호남신문』이라는 명칭으로 신문이 다시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9월 16일 『호남일보』 출신의 김형철이 『호남신문』을 창간하여 만들면서부터이다. 지금 발행되고 있는 『호남신문』의 등록번호는 광주가 00021[일간]이며, 매일 15~16면의 지면 신문을 발행 중이다. 지면 신문은 pdf 파일로 홈페이지에서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2021년 3월 기준으로 회장·발행인·편집인은 김평호, 편집국장 직무대리는 서선옥이다. 구독료는 월 1만 원, 1부 500원이다.

[의의와 평가]

『호남신문』은 가로쓰기를 채택하고 주식회사 체제를 도입한 언론사로서 의의를 가진다. 다만 2007년 재발행된 『호남신문』과의 연관성은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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