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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67
한자 徐廷禧
영어공식명칭 Seo Jeonghu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서정희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4년 - 서정희 한성영어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서정희 독립협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00년 8월 - 서정희 광주우체사 사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서정희 대한신민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2월 - 서정희 5년 유배형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13년 10월 - 서정희 사립광주법학강습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15년 2월 - 서정희 만주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서정희 광주3.10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서정희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서정희 광주소작인연합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서정희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서정희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 복역,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서정희 신간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서정희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감찰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서정희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8년 5월 - 서정희 경기도 포천군 제헌 국회의원 당선
몰년 시기/일시 1950년 7월 - 서정희 납북
출생지 경기도 포천현
학교|수학지 한성영어학교 - 한성부 중부 수진방
활동지 광주우체사 - 전라남도 광주군
활동지 사립광주법학강습소 - 전라남도 광주군
활동지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 - 전라남도 광주군
활동지 신간회전남지회 - 전라남도 광주군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광주우체사 사장|대한신민회 회원|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신간회 조직부장|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감찰위원|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한국민주당 제헌 국회의원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으로 독립운동, 농민운동, 사회주의운동을 펼친 정치인.

[개설]

서정희(徐廷禧)[1877~?]는 경기도 포천현[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사회주의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광주소작인연합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으며,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우익 진영으로 옮겨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남한 단독 선거에서 경기도 포천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납북되었다.

[활동 사항]

서정희는 1877년(고종 14) 경기도 포천현에서 태어났고, 18세 때인 1894년(고종 31) 한성부 중부 수진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96년(고종 33) 독립협회에 가입한 것으로 보아 근대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장기 시절까지 전라남도 광주 지역과 전혀 인연이 없었고, 1900년 8월 광주우체사(光州郵遞司) 사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인연이 닿았다.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1906년 1월 나철, 정인국, 김인식 등 33명이 결성한 비밀 조직인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신민회의 목적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척살이었다. 1907년 2월 대한신민회 나인영 등이 권중현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정희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검거되었고, 서정희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珍島)에 5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유배가 풀린 뒤 광주군에 머물면서 1913년 10월 사립광주법학강습소를 창립하고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5년 2월 서정희는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3년 만에 만주 생활을 정리하고 1918년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919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있었던 3.10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10만세운동은 기독교 신자들이 주도하였는데, 서정희는 일반 시민을 동원하다가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이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서정희는 출소 후 사회운동에 나섰다.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농민들의 소작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3년 서정희는 면 소작인회를 조직하였고, 그 결과 광주군 15개 면 소작인회 연합기관으로 '광주소작인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는 사회주의 단체들이 개입하면서 새롭고 강력한 운동 단체로 변모하였다. 그중 북풍회(北風會)의 영향력이 컸는데 서정희도 북풍회에 참여하였다. 북풍회는 1924년 전국 조직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창립하였고, 서정희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서정희는 1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26년 11월 『농인(農人)」』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1927년 5월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8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11월 9일 신임 중앙집행위원 40명에 포함되었고,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재만조난동포위문회 일원으로 50일간 만주에 사는 동포들에게 위문 활동을 하였고, 이때부터 광복될 때까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8.15광복 이후 서정희는 과거와 달리 우익 진영에서 사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9월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감찰위원, 12월에는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1947년 4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5월 남한 단독선거에서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에서 한국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되지 않은 7월경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서정희의 행적은 1957년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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