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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33
한자 尹亨淑
영어공식명칭 Yun Hyeongsuk
이칭/별칭 윤혈녀,윤안정엽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9월 13일연표보기 - 윤형숙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윤형숙 수피아여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윤형숙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3.1운동 참가
몰년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연표보기 - 윤형숙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윤형숙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 4통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281
묘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여수제일교회 전도사|여수중앙교회 전도사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개설]

윤형숙(尹亨淑)[1900~1950]은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 4통에서 윤치운(尹致雲)의 3남 2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수피아여학교 생도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던 중 진압하는 일제 헌병대의 칼에 맞아 왼팔이 잘리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일제에게 체포되어 징역 4월의 옥고를 치르고 가택연금 4년의 고통을 당하였다.

[활동 사항]

윤형숙은 7세 때 전라북도 남원 동북교회 윤성만(尹成萬) 장로의 가정에서 자라며 복음을 접하였다. 이후 순천선교부 프레스톤(John F. Preston))[변요한(邊要翰)] 선교사 집으로 가 순천매산성서학원[지금의 순천매산중학교]을 수료하였다. 그리고 1918년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0세 되던 해, 수피아여학교 2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3.1운동은 3월 10일 3시 반 부동교 아래 백사장에 위치한 광주작은장터에서 장날을 기해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기독교인, 주민 등 1,000명에 이르는 군중이었다. 윤형숙은 동료 학생 20여 명과 함께 시위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평화적인 대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광주작은장터를 출발하여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 앞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본정통을 돌아 광주경찰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일본군 헌병들은 군도(軍刀)를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군중은 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물들었다. 윤형숙은 일본 헌병대가 휘두른 군도에 왼쪽 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

1919년 3월 1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작성하여 육군대신(陸軍大臣)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보낸 비밀 전문에 '광주에서 야소교(耶蘇敎)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다쳐 해산시켰음'이라고 기록하였다. 1919년 9월 18일 『독립신문』에 기월(其月)이 쓴 「피눈물」 단편소설 일부 기사를 살펴보면, '십칠팔 세나 되었을 여학생이 왼편 팔에서 흐르는 피를 공중에 내어 뿌리며 태극기를 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다.' 라고 기록하였다. 일제는 윤형숙을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생도 윤혈녀(尹血女)로 기록하였다.

1919년 4월 30일 오전 10시 광주지방법원에 광주 3.1운동 사건으로 체포된 80명과 함께 출석하였다. 윤형숙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고, 일제에 의해 4년간 격리 수용 조치를 당하였다. 1923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Martha Wilson Theological School]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팔과 눈의 증상이 악화되어 치료차 전라북도 전주 예수병원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후 쉐핑(Elizabeth Johanna Shepping)[서서평(徐舒平)]이 만든 전주 한예정성경학교[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 1927년 2월 23일 고창의 예수교회에서 야학을 개최하여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성경과 조선어 등을 가르쳤다. 1939년 무렵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귀향하여 여수제일교회와 여수중앙교회 전도사로 봉직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여수를 점령한 북한군과 내무서원들은 윤형숙을 예수교 신자로 지목하여 체포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골짜기 과수원[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둔덕동 순교지공원]에서 손양원(孫良源) 목사을 비롯한 시민 200여 명과 함께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묘소]

윤형숙의 묘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90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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