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14
한자 金鐵
영어공식명칭 Kim Cheol
이칭/별칭 김복현,하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10월 7일연표보기 - 김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69년 6월 22일연표보기 - 김철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철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목 서부면 금성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주YMCA 초대 총무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3.1운동을 이끈 나주 출신의 독립 유공자.

[개설]

김철(金鐵)은 1890년(고종 27) 10월 7일 전라남도 나주목 서부면 금성[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동] 출생으로 구한말 나주 지방에서 항일 의거를 일으켜 사형당한 민족주의자 김창곤의 아들이다. 본명은 김복현(金福鉉), 호는 하산(何山)이다. 광주YMCA 초대 총무를 맡았고,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터에서 3·1운동을 거행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초 최흥종(崔興琮)과 서울의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문」, 「동포에 고하는 격문」, 「독립가」 등을 입수하여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6일 광주군 효촌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동지인 김강(金剛)·최병준(崔丙浚)·송흥진(宋興眞) 등과 같이 광주 3.1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문·격문·태극기 등을 인쇄하고 준비하고 있다가,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터에서 김강 등과 같이 시민과 학생 10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광주 3.1운동을 거행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2부에서 광주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고 독립시위운동을 선동 권유한 이유를 들어 징역 3년형을 확정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 재판 과정에서 동지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최후 변론을 하였다.

"이 운동의 주모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그냥 돌려보내라. 내 이름은 김철이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 테면 해봐라."라고 주장하였다. 김복현은 이때부터 철(鐵)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철(鐵) 자를 쓰다가 나중에는 다시 철(哲) 자를 쓰게 되었다.

1920년 7월 29일 광주YMCA가 창립되자 최병준 회장을 도와 초대 총무로 봉사하였다. 또한 최흥종이 1927년 신간회 전남회장을 맡을 때 간사 일을 하였고, 1945년 최흥종이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을 맡을 때 역시 간사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4.19혁명 후에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는 등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하였으나,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고 1969년 6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철의 묘소는 전라남도 나주시 청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