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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86
한자 柳玶
영어공식명칭 Yu Pyeong
이칭/별칭 화보(和甫),송암(松菴),거인장덕(鋸人長德),대명처사(大明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7년연표보기 - 유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유평 식년시 진사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유평 양향유사(糧餉有司)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45년연표보기 - 유평 사망
출생지 창교리(滄橋里)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 지도보기
활동지 절양루(拆楊樓) -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지도보기
묘소 경렬사(景烈祠) -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1길 32[금안리75]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양향유사(糧餉有司)

[정의]

조선시대 이괄의 난·정묘호란 때 활동한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유평(柳玶)[1577~1645]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화보(和甫), 호는 송암(松菴)이다. 할아버지는 승지(承旨) 유사(柳泗)이며, 아버지는 별제(別提) 유경진(柳景進)이고, 외할아버지는 을사명현(乙巳名賢) 임형수(林亨秀)이다.

[활동 사항]

유평은 1577년(선조 10) 전라도 광주 마곡 창교리(滄橋里)[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장생은 성리학에 진심을 다하며 모든 행실이 소학의 예절에 맞는다 하여 유평을 거인장덕(鋸人長德)[덕이 높고 위대한 사람]이라 칭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노모와 함께 황해도 봉산으로 가서 3년간 피란 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과 교유하였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는 폐모론(廢母論)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면서 외할아버지인 임형수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1624년(인조 2)에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태릉(泰陵) 참봉(參奉)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고, 왕대비는 전주로 피신하자 유평은 가족들에게 양곡을 전주로 운반하게 하고 자신은 의병장이 되어 의병과 군량을 모았으나 난이 평정되자 의병을 해산하고 모았던 군량은 감영에 바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일어나자 호소사 김장생이 유평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임명하였고, 유평은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주로 가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정묘호란이 화의로 끝나고 세자가 상경하게 되자 여산(礪山)까지 세자를 호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유평은 전라도 광주목사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뜻을 전하였고, 광주목사는 군량과 화살을 내어 주었다. 유평은 두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과 함께 절양루(拆楊樓)[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들 유명익과 함께 근왕병을 거느리고 청주로 갔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며 전라도 광주로 되돌아왔다.

유평은 전라도 광주로 되돌아온 뒤 산자락에 집을 지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이고 두문불출하였다. ‘숭정’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명이 망한 이후에도 숭정 연호를 사용하여 존명대의(尊明大義)의 뜻을 드러낸 문구이다. 사림(士林)들은 유평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1645년(인조 23)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평경열사(景烈祠)[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1길 32[금안리 75]]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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