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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79
한자 鄭敏求
영어공식명칭 Jeong Mingu
이칭/별칭 경달(景達),묵재(默齋),황조의 유신(遺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5년연표보기 - 정민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정민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정민구 모병도유사(募兵都有司)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45년연표보기 - 정민구 사망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도감랑(都監郞)|감찰(監察)|비안현감(比安縣監)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정민구(鄭敏求)[1565~1645]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경달(景達), 호는 묵재(默齋)이다.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의 9세손이며, 청백리 호조판서 정순(鄭珣)의 6세손이다. 할아버지는 교리 정희렴(鄭希廉)이며, 아버지는 동계(東溪) 정즐(鄭騭)이다.

[활동 사항]

정민구는 1565년(명종 20)에 태어났으며,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의주(義州)로 나아가 용만(龍灣)까지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그 공으로 병조 낭관이 되었다. 이후 궐군(闕軍) 1,000여 명을 잡아들여 그 공으로 도감랑(都監郞)과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 9) 이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며,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이 나서 대신 아들 주부(主簿) 정지백(鄭之百)을 공주에 보내 임금을 호위하게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고순후(高循厚)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을 보고 모병도유사(募兵都有司)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향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세자를 여산(礪山)까지 호위한 뒤 전라도 광주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민구는 격문을 보고 자신의 종들과 의병들을 모아 수레에 양곡을 싣고 청주에 도착하였으나 굴욕적인 화의로 병자호란이 끝나자 통곡하면서 전라도 광주로 돌아온 이후로는 은둔하며 지내다가 1645년 사망하였다.

정민구는 스스로를 황조(皇朝)[명나라]의 유신(遺臣)이라 일컬으면서 사위인 상국(相國) 이완(李浣)과 함께 북벌의 계책을 논하였고, 병자호란의 이야기가 나오면 분함을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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