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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05
한자 崔應遠
영어공식명칭 Choi Eungwon
이칭/별칭 기지(器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바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627년연표보기 - 최응원 사망
부임|활동지 평안북도 의주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탐진(耽津)
대표 관직 외질괴만호(外叱怪萬戶)

[정의]

조선 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무신.

[가계]

최응원(崔應遠)[?~1627]의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기지(器之)이다. 고려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銓)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최경룡(崔景龍), 동생은 사맹(司猛) 최응적(崔應迪)이다. 아들은 위장(衛將) 최후천(崔後天)이다.

[활동 사항]

최응원은 전라도 광주 지역 출신으로, 타고난 자품(資稟)이 영민하고 비범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고,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외질괴만호(外叱怪萬戶)로 있으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의주(義州)로 나갔다. 1월 13일 후금(後金)이 의주를 포위하고 접전하였는데, 최응원은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과 힘을 합해 방어했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최응원은 타고 온 말과 말을 끌고 온 노복(奴僕) 복이(福伊)를 집으로 보내 자신의 죽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최응원은 치열한 전투로 여러 적을 참하였지만 끝내 순절하였다. 1월 20일 이전에 의주가 함락되고 부윤(府尹)과 판관(判官)이 피살된 것이 조정에 알려졌는데, 이때에 최응원 역시 사망하였다. 아들 최후천과 동생 최응적, 조카 최후익(崔後益) 등이 복수하고자 병사와 곡식을 모았으나 난이 평정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묘소]

최응원의 묘소는 그가 죽은 후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부득이 초혼(招魂)하여 광주의 용지산(龍池山)에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지평(持平) 안치택(安致宅)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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