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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69
한자 申叔舟
영어공식명칭 Shin Sook-joo
이칭/별칭 범옹(泛翁),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 신숙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신숙주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신숙주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신숙주 전농직장(典農直長)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1년 - 신숙주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신숙주 문과 중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신숙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2년 - 신숙주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신숙주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4년 - 신숙주 도승지(都承旨)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신숙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주문사(奏聞使)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6년 - 신숙주 병조판서(兵曹判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우찬성 겸 성균대사성(右贊成兼成均大司成)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7년 - 신숙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7년 - 신숙주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술
활동 시기/일시 1458년 - 신숙주 좌익 1등 공신(佐翼一等功臣) 책훈
활동 시기/일시 1458년 - 신숙주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우의정(右議政)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9년 - 신숙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좌의정(左議政)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68년 - 신숙주 원상(院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8년 - 신숙주 추충 협책 정난 동덕 좌익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推忠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책훈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신숙주 겸 춘추관영사(兼春秋館領事)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신숙주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 겸 경연청 영사(兼經筵廳領事)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71년 - 신숙주 좌리 1등 공신(佐理一等功臣) 책훈
활동 시기/일시 1471년 - 신숙주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74년 - 신숙주 국장도감도제조(國葬都監都提調)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475년연표보기 - 신숙주 사망
묘소|단소 신숙주선생묘(申叔舟先生墓) - 경기도 의정부시 보한재길 69[고산동 산53-7]
사당|배향지 구봉영당(九峰影堂)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사당|배향지 신숙주 사당 -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원고잔길 20[고잔리 901-1]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고령(高靈)
대표 관직 원상(院相)|영의정(領議政)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일대에 활약하였으며, 원상,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신덕린(申德隣), 할아버지는 공조참의를 지낸 신포시(申包翅), 아버지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신장(申檣)이다.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 나주정씨(羅州鄭氏)이다. 신숙주의 위로는 두 명의 형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와 누이가 한 명 있고, 아래로는 두 명의 남동생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가 있다. 부인은 윤경연(尹景淵)의 딸 무송윤씨(茂松尹氏)이며, 신숙주는 윤씨와의 사이에 8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은 차례대로 신주(申澍), 신면(申沔), 신찬(申澯), 신정(申瀞), 신준(申浚), 신부(申溥), 신형(申泂), 신필(申泌)이고, 딸은 신명수(申命壽)의 처이다.

[활동 사항]

신숙주는 1417년(태종 17)에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신숙주의 증조할아버지인 신덕린은 고려가 멸망한 뒤 광주 지역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이 대대로 나주에서 살던 정유의 딸 나주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신숙주 집안은 줄곧 나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는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였고,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 8월에 생원시를 거쳐 9월에 문과에서 3위로 급제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있는 신숙주의 졸기(卒記)에는 “어려서부터 기량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바로 기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과 급제 이후 전농직장(典農直長)에 제수되었고, 이조에서 신숙주를 제집사(祭執事)로 임명하였는데 실수로 관원이 첩(牒)을 주지 않아 해당 관원이 파직되는 일이 생겼다. 이에 신숙주는 “관원은 실제로 첩을 전하였지만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며 파직을 자청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441년(세종 23) 신숙주는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임명되어 집현전의 대표 학자로 활약하였으며,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을 세웠다. 1443년(세종 2)에는 서장관(書狀官)의 신분으로 일본 사행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세종이 죽은 뒤에는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 때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여 조선 이전의 왕조인 고려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업이 시작되었고, 신숙주는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김종서와 황보인(皇甫仁) 등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보다는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과 협력하고자 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에게 정치적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謝恩使)를 자청하여 명으로 갔는데, 이때 신숙주가 함께하면서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1453년(단종 1)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수양대군은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였다.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즈음하여 학자에서 정치가로 비중을 높여 가게 되었다. 세조가 왕이 된 후 신숙주는 지금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세조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명에 다녀왔다. 1459년(세조 5)에는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에 임명되어 국방의 일을 맡게 되었고, 이때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이승소(李承召)가 1477년(성종 8)에 작성한 「신숙주 신도비문」에 따르면, 세조가 “제환공(齊桓公)에게 관중(管仲), 한고조(漢高祖)에게 장량(張良),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 나에게 신숙주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나, 1467년(세조 13)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때 한명회와 함께 이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투옥되어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신숙주는 원상(院相)의 자리에 올랐고, 그 지위는 예종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도 유지되어 예전의 정치력을 회복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 때에는 영관사(領館事)로서 참여하였다. 1471년(성종 2) 신숙주는 왕의 즉위를 도운 공을 인정받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찬진(撰進)에도 일조하였다. 신숙주는 1475년(성종 6)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보한재집(保閑齋集)』은 신숙주의 작품을 엮어 간행한 문집이다. 1487년(성종 18)에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1645년(인조 23)에 중간되었으며 1922년에 재간되었다. 전체 17권 4책의 목판본으로, 서거정(徐居正), 김종직(金宗直) 등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기광주유향소(寄光州留鄕所)」라는 글은 제목 그대로 ‘광주 유향소에 부치는 글’로, 광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신숙주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신숙주가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기록한 일종의 방문기이다.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으며, 신숙주 자신의 서문을 비롯하여 7장의 지도,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로 구성되어 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세종 30)에 신숙주와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등이 국왕의 명을 받아 찬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 6권 6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1권과 6권, 그리고 건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완질본(完帙本)이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조선 역대 왕들의 선정(善政) 사례를 모아 엮은 책으로, 세조가 신숙주와 권람(權擥) 등에게 명하여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보감을 처음으로 찬진하였다. 이후에도 이 보감 사업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고종 대에 이르러 그 이전의 보감을 총괄하여 전체 90권 28책의 거질(巨帙)이 완성되었다.

[묘소]

신숙주의 묘소는 신숙주선생묘(申叔舟先生墓)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 구봉영당(九峰影堂)은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하고 신숙주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고령신씨 종중에서 매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고잔리에 있는 신숙주선생사당은 신숙주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현재 평택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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