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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극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66
한자 權克和
영어공식명칭 Kwon Geuk-hwa
이칭/별칭 용부(庸夫),습재(習齋),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11년 - 권극화 생원 입격
활동 시기/일시 1414년 - 권극화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14년 - 권극화 형조참판(刑曹參判)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30년 - 권극화 낙안군수(樂安郡守)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권극화 경주부윤(慶州府尹)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권극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권극화 「서석규봉기(瑞石圭峯記)」 저술
활동 시기/일시 1440년 - 권극화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0년 - 권극화 나주목사(羅州牧使)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42년 - 권극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6년 - 권극화 평안도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권극화 장성현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448년 - 권극화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겸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51년 - 권극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2년 - 권극화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에 임명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형조참판(刑曹參判)

[정의]

조선 전기에 충청도관찰사, 중추원부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권극화(權克和)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용부(庸夫), 호는 습재(習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도첨의(都僉議) 권진(權賑), 할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권흥(權興), 아버지는 우사간(右司諫),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추증된 권삼(權參)이다. 첫째 부인은 서원이씨(西原李氏), 둘째 부인은 양주조씨(楊州趙氏)이며, 이씨와의 사이에 권기(權琦), 조씨와의 사이에 권감(權瑊)을 두었다.

[활동 사항]

권극화는 1411년(태종 11) 생원에 입격하였고, 3년 뒤인 1414년(태종 14)에 정시(庭試)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낙안군수(樂安郡守)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강직하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과단함이 있었다. 1433년(세종 15)에 경주부윤(慶州府尹), 1439년(세종 21)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이듬해인 1440년(세종 22)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권극화의 관직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1446년(세종 28)에 평안도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평안도 일대의 기근을 잘 구제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1447년(세종 29) 장성현(長城縣)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다시 복직된 권극화는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 전제와 전세 등의 실상을 아뢰는 상서에서 세종 대에 제정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의 폐단을 지적하고 다시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권극화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권극화는 전라관찰사를 지낼 때 무등산을 비롯한 광주 지역 일대의 산수를 유람하고 소회를 작품에 남겼다.

[학문과 저술]

권극화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권극화의 시문이 여러 편 전하고 있다. 권극화가 지은 「서석규봉기(瑞石圭峯記)」는 현재까지 알려진 무등산 유람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이것은 1439년(세종 21) 전라관찰사 재임 당시에 지은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18세기 조선까지의 유람기를 모은 『와유록(臥遊錄)』에 실려 있다.

[묘소]

권극화의 8대 후손인 권상하(權尙夏)의 문집 『한수재집(寒水齋集)』 권 31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권극화의 묘표(墓表)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광주(廣州) 언주리(彦州里) 청담(淸潭)의 위 경좌(庚坐) 자리에 고(故) 참판(參判) 권공(權公)이 묻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권극화는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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