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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36
한자 鄭地
영어공식명칭 Jeong Ji
이칭/별칭 정준제(鄭准提),경렬(景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다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7년연표보기 - 정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정지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366년 - 정지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82년 - 정지 지문하부사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83년 - 정지 관음포 전투에서 왜구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84년 - 정지 문하평리에 임명되어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과 이키섬 정벌 건의
활동 시기/일시 1384년 - 정지 해도원수 사도도지휘처치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정지 안주도도원수에 임명되어 요동 정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정지 위화도회군에 동참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정지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에 임명되어 남원 등지에서 왜구 격퇴
몰년 시기/일시 1391년연표보기 - 정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3년 - 정지의 경열사유허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21년 - 정지 나주 경렬사에 배향
출생지 죽곡마을 -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안곡리
부임|활동지 위화도 -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부임|활동지 관음포 -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남해대로 3829]
유배|이배지 경상북도 하동군 횡천면
묘소|단소 정지장군예장석묘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남해 정지석탑 -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
사당|배향지 경렬사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922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렬사 -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1길 32[금안리 75]
성격 무관
성별
본관 나주
대표 관직 전라도안무사|지문하부사|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문하평리

[정의]

고려 후기 나주 출신으로 전라도와 광주 지역 등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정지(鄭地)[1347~1391]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초명은 정준제(鄭准提)이다. 정지의 아버지는 정리(鄭履)이고, 아들은 정경(鄭耕)이다.

[활동 사항]

정지는 전라도 나주목 거평부곡 출신으로 1365년(공민왕 14)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전라도안무사(全羅道安撫使)에 발탁되었다.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군대 운용을 개선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1378년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하여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1379년 순천·조양(兆陽)·진원(珍原) 등지에서 왜구와 전투하여 패전하였다.

정지는 1380년(우왕 6) 전라도에서 왜구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고,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1383년 여러 도에서 전함을 건조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383년 5월 정지는 관음포(觀音浦) 전투에서 왜선 17척을 완파하였다. 1384년(우왕 12)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과 이키섬[壹岐島] 정벌을 건의하였으며, 해도원수 사도도지휘처치사(海道元帥四道都指揮處置使)에 임명되었다.

1388년(우왕 14)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遼東) 정벌이 추진되자 정지는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자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1390년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으며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淸州)의 옥에 갇혔으나 풀려나 외방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주로 낙향하지 않고 광주목 편방면으로 낙향하였다.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묘소]

정지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번지에 있는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이며, 광주광역시 기념물이다.

[상훈과 추모]

정지의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관음포 전투가 있었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남해 정지석탑(南海 鄭池石塔)이 있다. 1393년(태조 2) 회군 공신 2등의 예로 정지에 대한 포상과 책록이 이루어졌다. 1394년(태조3) 전라도 왜구 격퇴의 공로를 기려 정지의 집을 정표(旌表)하였다. 1403년(태종 3)과 1477년(성종 8)에 정지의 후손들이 서용(敍用)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가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에서 정지를 배향할 것을 건의하였다.

1644년(인조 22) 정지를 기리는 사당인 편방사(片坊祠)가 건립되었다. 1718년 정지의 9대손인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을 비롯하여 설강(雪江) 유사(柳泗), 송설정(松雪亭) 고중영(高仲英), 구성 전상의, 송암(松菴) 유평(柳坪), 고중영의 아들 구암(龜岩) 고경조(高敬祖), 시은(市隱) 유성익(柳聖翊) 등을 추가하여 8현을 모셨다고 유허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팔현사(八賢祠)로 불렸는데,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고, 1893년(고종 30)에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정지 장군의 문중에서 나주 노안면(老安面) 금안리(金鞍里)에 사우를 다시 설치하여 경열사(景烈祠)라 이름하였다. 지금도 나주 경열사(羅州景烈祠)가 남아 있다. 1978년 사단법인 정지장군유적보존회에서 광주광역시 망월동 분토마을경열사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에 완공하였다. 경열사 사우 안에는 아천(雅泉) 김영철(金永哲)이 그린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경열사 주변에는 경열사유허비[1893년 건립, 기우만(奇宇萬) 지음]와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1980년 건립, 이은상(李殷相) 지음, 김충현(金忠顯) 씀], 정지장군유적정화기념비[1981년 건립, 이병도(李丙燾) 지음, 안규동 씀]가 있다. 이 밖에 경상남도 남해군에도 1977년 건립된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가 있다.

2007년 6월 13일 해군에서는 국내 최대인 214급(1,800t급) 2번째 잠수함의 명칭을 정지함으로 결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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