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일곡마을 광주노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13
한자 日谷-光州盧氏世居地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75가구[1930년 기준]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있는 광주 노씨 세거지.

[개설]

국내 성씨 중에는 본관을 광주로 쓰는 노씨(盧氏)와 광산을 쓰는 노씨가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씨족원류(氏族源流)』 등은 다같이 본관을 광주라 하고, 시조를 노만(盧蔓), 노서(盧恕)로 각각 달리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사는 노씨들은 광주노씨라 하고, 광주광역시나 전라남도에 사는 노씨들은 광산을 본관으로 쓴다.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광산을 토성으로 노(盧)씨 등 13성을 적고 있어서 노만을 시조로 모시는 광주 사람들을 광산 본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연원]

한국의 노씨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일어났던 안녹산의 난[755~763] 때 난리를 피하여 한반도에 건너왔다는 노수(盧穗)와 노수의 아들 9형제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광산노씨는 노수의 큰아들 노해(盧垓)의 후손임을 주장하면서도 정확한 세계(世系)를 잃어 고려 말엽의 인물 노만을 세계상의 중조로 받든다. 이에 반하여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살면서 광주노씨를 자칭하는 문중은 기1세 중조를 노서라 하고, 상주파라 부르기도 한다. 두 집안은 서로 합해질 수 없을만큼 세계가 각각 다르다.

경상도 광주노씨 집안에서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盧守愼)[1515~1590]을 배출하는 등 문과 급제자를 여러 명 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광주파[광산 본관] 후손이고 노태우 대통령은 교하노씨이다. 교하노씨는 시조가 노오(盧塢)이고, 노수신과 함께 조선 초엽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盧思愼)[1427~1491]도 이 집안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낸 집안은 풍천노씨(豊川盧氏)로 시조가 노지(盧址)이다. 노씨 9형제 집안들은 1926년 구원회(九源會)라는 조직을 가지고 큰 집안인 광산노씨 중조의 묘지가 있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능안동네 기슭에 산릉단을 만들고, 매년 3월 15일 구원재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광산노씨 중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올라와 있는 인물은 노준공(盧俊恭)[1340~1397]으로 고려 때 효자 항목에 나와 있다. 전설에 노준공은 고려 우왕 때 사람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광주의 세심계(洗心溪)에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조선 초엽 노씨들은 북구 생용동 모산 동네에서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35세의 나이로 죽은 노희서(盧希瑞)[1558~1592]가 지금의 일곡동으로 옮겨와 살았다. 고경명 휘하에서 금산싸움 때 죽은 뒤 노희서의 의발을 거두어 일곡동에 묘지를 썼다. 노희서는 선무원종공신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광산 토성으로 나오는 이 집안은 고려 말 조선 초 광산 향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엽 이 집안은 광주 토성이며, 향리였던 하남정씨 정급(程岌)[1398~?]이 노준공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형성 및 변천]

1930년 인구 통계 때 일곡에는 노씨가 75집, 기타 성씨가 21집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일곡동 인구는 1만 1000가구 3만 5000명을 넘어서고, 27통 147개 반으로 나뉘어 일곡동만 떼어 노씨 문중 집안을 가릴 수 없다. 일곡 남쪽 본촌동에 1979년 본촌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일곡동의 내촌과 양기 동네가 포함되어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는 등 112개 업체가 들어왔다. 이에 따라 일곡동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중·고등학교가 이사왔으며, 광신대학교도 세워졌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조사한 『광주의 동족마을』에 보면 1993년 동네 가구수는 275가구로 그 중 102가구가 광주노씨였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 통계는 이웃 일동 동네까지도 포함하였던 듯하다. 다만 노씨 동네는 36통이고, 일동은 37통이었다.

[자연환경]

일곡 동네는 본디 한실[一谷]이라 부르던 곳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온다. 당시 석제면에 속하였던 이 동네는 1914년 이웃 일동 동네와 합쳐 일곡리가 되어 본촌면에 속하였다. 1932년 본촌면과 우치면이 합하여 지산면이 되었다. 일부는 서반면과 서산동을 거쳐 다시 2003년 서산면에서 분동하여 일곡동이 되었다. 한때 지산출장소에 속하였다가 1980년 북구에 속하였다. 동쪽으로 삼각동이 있고 북쪽으로 건국동이 있으며, 서남쪽에 본촌동이 있는 분지형 지대이다.

[현황]

노씨촌으로 불리던 일곡 인구가 3만 명을 넘어서면서 노씨만의 인구나 가구를 가리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다만 일곡동 뒷산 기슭에 노준공과 노희서를 모신 절효사[1859년 초설]라는 사우와 일신당[1946년 건립], 노준공의 효자정려각, 유허비, 노종용을 모신 만주사[1950년 초설], 노종용이 노닐던 경의재[1930년 건립], 노재규의 원풍정[1897년 초설], 송해당[1860년 초설]이 있고, 시멘트 3층 건물의 회관인 감모재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