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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장송 데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25
한자 民主主義葬送-
이칭/별칭 민주주의 장송 시위,광주 3.15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연표보기 - 민주주의 장송 데모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연표보기 - 민주주의 장송 데모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 - 3.15 부정선거

[정의]

1960년 3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시 민주당원 및 시민들이 모여 벌인 정·부통령 선거 부정행위 규탄 시위.

[개설]

민주주의 장송데모는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진 것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3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시 민주당원을 포함한 200여 명의 군중은 전라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민주주의장송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4번째 연임을 위한 폭력·부정 선거로 치러졌다. 광주시와 전라남도에서도 대리 투표, 사전 투표, 3인조 투표 등이 실시되었다. 부정선거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민주당은 독자적으로 '부정선거 감시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즉, 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의 학생들을 통해 부정선거감시단을 조직, 이들을 광주시 각 투표소에 배치하여 부정선거를 감시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들 감시단 및 민주당 참관인들은 투표소에서 내쫓겼다. 이에 민주당 전남도당은 투표소에 배치했던 부정선거감시단 및 참관인을 철수시키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경과]

민주당 광주시지부는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경, 민주당 전라남도 선거사무소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청으로 향하는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 참관인 70여 명과 100명의 당원 및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장장(葬章)을 두르고, 백건(白巾)을 쓰고서 "민주주의는 절명했다.", "우리의 자유를 찾자!"고 외치며 전라남도청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전라남도청에 못 미처 광주YMCA 앞에서 무장 경찰대와 소방차의 진압으로 인해 흩어졌다가, 이후 민주당원 및 200여 명의 군중은 전라남도청 앞까지 전진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날, 민주당 광주시지부는 "역사적인 3.15 정·부통령 선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절명(絶命)케 한 날이다. 자유당과 자유당 정부는 선거운동을 가지각색으로 방해하였으며, 선거기간 중 도내(道內)에서 사람이 두 명이나 피살되었고, 4할은 사전투표 4할은 공개투표 그것도 부족해서 각 투표소에서 참관인을 강제 축출하는 등 민주주의는 완전히 도살절명(屠殺絶命)되고 말았다. …(중략)… 우리는 민주주의 시체 위에서 민주주의 소생을 위하여 불퇴전(不退轉)의 투쟁을 과감히 계속할 것을 이에 성명한다."는 내용의 「민주주의장송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결과]

1960년 3월 15일 시위는 소방차 및 경찰의 진압에 의해 1시 25분경 다시 민주당 전라남도 선거사무소로 쫓겨오면서 끝났다. 그리고 민주당 전남선거사무장 이필호(李弼鎬) 의원 외 3명이 연행되었다가 오후 2시 10분경 모두 석방되었다. 다음날인 3월 16일에는 광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부정선거 규탄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어 1960년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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