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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50
한자 光州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성태

[정의]

조선 초기 축조되었다가 1910년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광주광역시의 읍성.

[개설]

광주성은 조선 초기에 동헌과 객사 등 관아가 있었던 읍성이다.

[형성 및 변천]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석축 둘레가 8,253척, 높이 9척, 성안에 1백 개의 우물과 여첩(女堞)[성 위의 얇은 담으로, 지금은 없어짐]이 있다. 성문으로 동쪽에 서원문(瑞元門), 서쪽에 광리문(光利門), 남쪽에 진남문(鎭南門), 북쪽에 공북문(拱北門) 등 4개의 문이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1, 2가인 무등시네마, 충장로우체국 일대가 조선시대 객사 터였는데, 객사 안에는 목사의 집무 장소로 쓰인 동헌과 부속 건물이 있었다. 확인된 성벽의 높이는 1.9m 정도이다.

동헌 등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읍성 안 옛 전라남도청 터는 고려 초기 재명석등(在銘石燈) 등의 유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였을 것이다.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읍성유허(光州邑城遺墟)는 1992년 4월 전라남도청 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부지를 정리하던 중 확인된 유적으로, 지적도상에도 그 흔적이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축 당시 확인된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다.

[관련 기록]

『광주읍지』 성지(城池)에는 “읍성(邑城)은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8,253척(尺)이고 높이가 9척(尺)인데 성안에 백 개의 우물과 여첩과 4개의 성문[동쪽에 서원문, 서쪽에 광리문, 남쪽에 진남문, 북쪽에 공북문]과 연못[지금은 없어짐.]이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光山縣) 성곽에는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다. 주위가 8,253척,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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