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화의 그늘 무등산 타잔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68
한자 都市化-無等山-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선화

[정의]

무등산 개발 사업을 위해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도시 빈민의 분노에서 기인한 사건.

[개설]

무등산 타잔 사건은 1970년대 근대화의 이면에 도사리는 소외된 이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소외된 이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다. 또한 도시 빈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과 국가 사업에서 하층민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무등산의 개발과 도시 빈민]

1957년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중앙 정부에 무등산 관광 개발 사업을 제안하였다. 또한 1958년 교통부에 무등산을 관광지로 지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광주상공회의소는 무등산 개발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산림과 자연 자원의 보호, 관광 도로 개설, 관광 호텔 유치, 안내서 발간, 사찰 복구 지원 사업 등을 계획하였다. 정부는 무등산을 비롯한 전국 각 시도권의 산지에 호텔을 신설하는 계획을 공식화하였다.

1958년 무등산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길을 넓혔다. 길의 폭을 넓히고, 교량과 하수구를 설치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1972년 무등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에는 도로를 포장하였다. 1976년부터 국토 종합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도시 개발 계획과 도립공원 종합 개발 계획으로 무등산 개발이 시작되었다.

무등산 개발이 시작되기 이전인 1975년 광주 도심지에서 무등산증심사(證心寺)에 이르는 도로가 포장되어 사람들의 접근성이 용이해졌다. 이렇게 무등산은 관광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방문객들이 늘어났고, 포장된 도로에 자동차를 타고 무등산을 둘러보았다. 또한 무등산에 리프트카 설치가 결정되었다.

박흥숙(朴興塾)의 집이 있던 덕산골은 리프트카로부터 가시거리에 있었다. 경관을 헤치는 덕산골의 무허가 주택들은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다. 이렇듯 무등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덕산골의 철거는 보상이 전제되지 않았다. 도시 빈민들은 이 철거로 집을 잃었고, 희망을 잃었다. 비단 덕산골에서만 철거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도립공원 개발 계획으로 인하여 무등산 내에서도 여러 군데 철거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국토 개발이 진행되면서 전국의 도시에는 철거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 도시개발 정책은 하층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으며, 도시 재개발과 관련되어 주로 철거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심화되었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도시는 이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살기 어려워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의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동네에 움막을 짓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의 경우 광주천변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 무등산 속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가난하여 방 한 칸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박흥숙과 무등산 무허가 움막집]

박흥숙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무등산 안에 정착하였다. 박흥숙은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족들은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남죽리로 이사하였고, 박흥숙도 군서국민학교[지금의 군서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심금순]는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국민학교 5학년 재학 중 아버지를 잃고, 6학년 때 형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흥숙의 가족은 박흥숙과 어머니, 여동생[박정자], 남동생 둘뿐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박흥숙의 가족은 전라남도 광주시로 이주를 결정하였다. 박흥숙은 영광군에서 군서국민학교를 또래보다 늦게 졸업하였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였다. 영광중학교에 수석 입학하였지만, 교복을 마련할 돈도 없었고, 가족들은 먹고 살기 위해 광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광주에서도 박흥숙의 가족이 살 곳은 없었고, 가족들은 흩어져야 했다. 동생은 가정부 일을 시작하였고, 어머니는 전라북도 정읍의 내장사에서 찬모로 일하였다. 박흥숙도 상점 점원, 열쇠 수리공을 하며 집을 장만하고자 했지만 형편이 쉽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박흥숙은 직장을 그만두고 강의록을 사서 본격적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였다. 박흥숙은 독학으로 준비를 해서 5개월여 뒤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검정고시 합격 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흩어진 가족이 같이 살 수 있도록 무등산에 움막집을 지었다. 무등산 움막집에서 박흥숙은 고등학교 검정고시와 사법고시를 준비하였다. 무허가 움막집은 가족의 안식처이자 정착의 장소였다. 박흥숙은 동생과 도롱뇽 알을 주워서 판 돈으로 용돈을 마련하며 살았다.

[무등산 무허가 건물 철거와 '무등산 타잔 사건']

당시 무등산 덕산골에는 무허가 건물이 20여 채 있었는데, 여러 차례의 강제 철거로 1977년 철거반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는 4채 정도 남아 있었다. 박흥숙의 집도 철거 대상이었다. 철거 계고장을 받은 박흥숙은 시내에 나가 형편에 맞는 방도 찾아보고, 천막 칠 곳도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 신림마을에 7번이나 계고장이 날아와도 철거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박흥숙은 설마 철거가 진짜 진행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박흥숙은 철거반원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철거하는 사람들도 같은 서민이고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욕하지 말자.'고 생각하였다.

1977년 4월 20일 오후 3시경 광주시 동구 운림동 산 145번지 증심사 계곡 덕산골에서 무허가 건물 철거가 시작되었다. 철거반원은 광주시 동구청 소속으로 7명이었다. 이 날 철거반원들은 무허가 건물의 세간을 집 밖으로 꺼낸 뒤 박흥숙이 "지붕 위의 천막이나 상하지 않도록 걷게 해달라."고 원했지만 불을 질렀다. 이때 박흥숙의 어머니는 천장에 모아두었던 돈 30만 원을 챙기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려다 철거반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리고 박흥숙의 윗집을 철거하러 갔다. 그곳은 박흥숙 가족보다 더 어려운 결핵과 당뇨를 앓고 있던 노부부가 살고 있던 집이었다. 그곳에서도 철거반원들은 무자비하게 철거를 시작하였고, 박흥숙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박흥숙은 양동 철물공장에서 일할 때 만든 사제총[일명 딱총]을 발사하고, 철거반장에게 철거반원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철거반원들과 여동생을 시켜 철거반원의 몸을 노끈으로 묶게 하였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동생은 시청에 전화를 하러 산을 내려갔다. 그 사이 박흥숙은 자신의 공부방을 만들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에 이들을 몰아넣고 철거용 쇠망치를 휘둘러 4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미리 빠져나온 두 명을 제외하고 유일한 생존자는 김영철로 뇌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과 기동타격대 대원들이 덕산골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50분이 되어서였다. 경찰은 '철거반원피살사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박흥숙을 찾았으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무등산을 빠져나간 박흥숙은 양동시장 시계점 주인 고인환의 집에 나타나 "집이 철거되었으니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말하였고, 그 직후 고인환은 경찰에 신고하였다.

박흥숙은 사건 발생 이틀만인 4월 22일 중앙정보부에 자수를 하였다. 박흥숙의 자수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일었다. 당시 신문에는 서울 상계동 이모집에 은신했다가 신고로 체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2차 법정에서 박흥숙이 자수했다는 내용이 제기되었다. 그것도 경찰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무등산을 나와 자수했을 때까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박흥숙은 양동시장에서 하늘색 점퍼를 구입해서 입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여수로 가는 차를 탔다. 여수로 가는 차 안에서 외항선을 탄다는 정 모씨를 만난다. 그런데 정 모씨의 입에서 '인민공화국'이니 '남조선'이니 하는 말이 나왔다. 박흥숙은 정 모씨와 여수의 한 여인숙에서 1박을 한 이후 서울행 열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해서 박흥숙은 정 모씨를 중앙정보부에 신고하면서 자신도 자수하였다.

박흥숙의 자수와 관련하여 여동생 박정자에 의하면, 사건 직후 자신과 어머니가 광주경찰서에 잡혀 있었는데 박흥숙이 둘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또 1978년 2월 항소심에서 변호사 이기홍도 자수하면서 신고한 사람이 진짜 간첩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정상 참작을 해야 한다는 변론을 하였다.

['무등산 타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그렇다면 당시 광주 시민들은 박흥숙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1977년 8월호 월간 『대화』에 박흥숙에 대한 르포 기사를 낸 김현장의 글을 읽고 당시 광주YWCA 이사로 있던 안성례를 중심으로 서명 작업과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구명 운동에는 박순천, 김옥길, 오지호 등 63명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박흥숙은 공부해보려고 꿈을 갖고 사는 소시민이었다. 평소 효성이 지극했고, 순진한 성격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사람을 네 명이나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된 도시 하층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사건이자, 대책 없이 진행된 행정상의 횡포가 부른 참극이었다."고 사건을 규정하였다.

구명 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들은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서를 냈다. 탄원서 내용을 살펴보면 "비록 박흥숙이 저지른 일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철거반원이 불을 지르고, 어머니를 밀어 넘어뜨리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으로 정상 참작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하였고, 항소심은 기각되었다. 1978년 5월 대법원 상고심 공판에서 사형 선고에 대한 원심을 확정하였고, 박흥숙은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박흥숙은 광주교도소에서 1980년 12월 24일 형이 집행되어 삶을 마쳤다.

당시 언론은 박흥숙을 잔인한 살인자로 묘사하였다. 박흥숙은 검정고시를 본 이후 사법고시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공부를 너무 오랫동안 하면서 쇠약해졌고, 박흥숙은 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박흥숙은 공부를 더 오랫동안 하기 위해 운동을 했을 뿐 운동의 고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의 보도를 보면 과장과 허구가 난무하다. 무술 유단자라는 내용부터 심지어 사이비 종교와 관련을 짓기도 하였다. 박흥숙이 살았던 곳에 무당들이 많이 살아 무당골이었다는 내용도 보도에 보인다. 박흥숙을 살인마에 사이비 종교와 무속에 빠진 인물로 그린 것이다. 이러한 과장되고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는 철거반원들의 폭력적 행동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등산 타잔 사건' 그 이후]

1977년 사건이 일어난 직후 언론은 덕산골을 무당촌으로 부르며 사이비 종교에 광분한 무지한 도시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묘사하였다. 언론에서는 도시 빈민의 모습을 무지와 무식, 무허가 주택들은 빈곤과 범죄가 가득찬 곳으로 타자화되었다. 실상 도시의 무허가 정착지는 도시 중심부에서 밀려난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협력과 유대, 전통적 공동체 생활양식이 아스라하게 잔존했던 장소였다. 건설 노동, 주부 취업 알선, 노점과 행상 등 거의 모든 취업에서 지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현실은 가난과 불안정 등으로 덮여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끝난 뒤 전국의 도시에는 월남인들과 농촌에서 들어온 이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무허가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점점 도시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흘러들었다. 이들은 도시 주변부에 천막을 치고 구걸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60년대 들어도 도시로 유입하는 인구는 더 늘었고, 이들의 무허가 정착지는 확대되었다. 박흥숙과 같은 이농 도시 하층민은 도시 내에서 범법자, 폭력배, 강도, 노점상, 부랑민, 자유노동자, 매매춘 여성 등 '도시의 어둠과 같은 이질적인 타자'로 여겨졌다.

이농에 따라 도시 하층민과 무허가 주택이 증가하자, 1960년대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런 도시 재개발은 도시 하층민에게 집을 가질 기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시 하층민들은 도시의 외곽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결국 도시 하층민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찬란한 도시의 빛과 거리가 먼 어둠 속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흥숙의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박흥숙의 여동생 박정자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물러난 5월 21일, 어머니인 심금순과 함께 직접 주먹밥을 지어 시민군에게 전달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어머니와 함께 2007년 오월어머니집이 제정한 '제1회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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