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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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榮泰 |
영어음역 | Byeon Yeongtae |
이칭/별칭 | 일석(逸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진 |
일제강점기에서 현대 구로 지역 출신의 정치인.
호는 일석(逸石)이다. 1892년(고종 29)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9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형은 변영만(卞榮晩)[1889~1954], 동생은 변영로(卞榮魯)[1898년 5월 9일~1961년 3월 14일]이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의 밀양변씨(密陽卞氏) 묘역에 변영태의 묘가 있다. 삼형제의 묘가 나란히 있는데 가운데 변영태(卞榮泰)의 묘가 있다. 묘비는 높이 66.5㎝, 너비 83㎝, 두께 21.5㎝이며, ‘우리들의 생활률’ 10절목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상석은 가로 106.5㎝, 세로 73.5㎝, 두께 27㎝이다.
변영태는 1912년 만주의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1945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1년 외무부장관이 되어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개최된 에카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6·25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의 어려움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영태는 이 회의에 참석할 때 가지고 간 여행 경비를 남겨서 돌아올 정도로 청렴하고 곧은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7~9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 대표로 활동하였다. 1953년 5월 29일 6·25전쟁 휴전 후 5개 중립국의 한국 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전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에서 탈퇴시키겠다고 유엔군을 위협하였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 1954년 5월 22일 외무부장관으로서 한국 통일 문제를 제안하였다. 1962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에 『외교록』, 번역서로는 『논어』[영역]가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