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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723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사람의 힘으로 자전거를 움직여 속도 경쟁에 임하는 경기.

[개설]

군산의 사이클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올라간다. 당시 자전거는 지금의 자가용보다 귀한 물건이었으며, 군산은 다른 도시에 비해 자전거를 수리·판매하는 업소가 많았다고 한다.

군산 자전거 선수회(群山自轉車選手會)가 호남 자전거 경기 대회를 해마다 개최해오고 있으며 경기 때마다 6000~7000명의 관중이 성황을 이루었다는 『동아 일보』[1929년 10월 19일] 기사 내용으로 미루어 군산 시민은 사이클 경기를 좋아하였고, 선수들도 활발히 활동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전 군산의 사이클]

군산에서는 1928년 처음으로 자전거 경기가 열렸다. 당시 군산 윤업회(群山輪業會)는 개항 29주년을 맞아 동년 5월 2일 군산 공중 운동장에서 자전거 경주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사이클 대회 월계관은 군산 출신 김마춘 선수에게로 돌아갔다. 1936년에는 대규모 대회가 개최된다. 군산에 지국을 두고 있는 신문사 『동아 일보』, 『조선 일보』, 『매신 일보』, 중앙 연합 주최로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가 7월 29일 부영 공설 운동장에서 이틀 동안 열린 것. 신의주를 비롯해 평양, 경성[서울], 조치원, 광주 등지에서 선수 70여명이 참가했으며 수천의 관중이 운동장을 메웠다고 한다. 군산 출신 입상자는 신상옥, 양기순, 오동실 등이었다.

1938년 8월 7일 경성 운동장[현 서울 운동장]에서 야간 경기로 펼쳐진 대매(大每)주최 전일본 자전거 경기 선수권 조선 대회에서 군산의 신상열, 박성배 선수가 입상권에 들었다. 1000m 경기에서 2조(組)의 신상열 선수는 2위[1분 55초 9], 4조(組)의 박성배 선수도 2위[1분 33초 1]로 예선을 통과하였다.

동아 일보 공주 지국이 주최하는 전조선 남녀 자전거 경기 대회가 1939년 4월 26일 신록이 우거진 공주 쌍수 산성 공원에서 개최됐다. 경향 각지 남녀 선수들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룬 이 대회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군산 출신 이복순이 여성부에서 1위로 우승하였고, 이옥주가 3위에 입상, 군산의 ‘우먼 파워’를 과시하며 화제를 모았다.

1939년 7월 15일~16일 양일간 경기도 수원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 남녀 자전거 경기 대회에 군산에서도 참가하였다. 수원 자전거 선수회와 수원 백미당(百味堂)이 공동 주최한 이 대회에는 전국에서 기라성 같은 선수 80여 명이 참가했는데 군산 출신 채구루(蔡九樓) 선수가 500m 결승에서 1위로 골인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1940년 6월 동아 일보 강경 지국이 주최한 제1회 전조선 자전거 경기 대회에 군산 선수들도 참가하였다. 평양, 진남포, 인천, 조치원, 광주, 목포 등 전국 각지에서 50여 명이 백열전을 펼쳐 군산 출신 채종철(蔡鐘喆) 선수와 남기남(南基男) 선수가 사이클 부분 개인 결승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도시 대항은 남기남 선수가 출전하여 2위를 차지했다.

[해방 이후 군산의 사이클]

해방후 군산의 사이클은 점차 침체되기 시작한다. 제2회 전국 자전거 선수권 대회겸 런던 올림픽[1948] 파견 제2차 후보 선발전이 조선 자전거 연맹 주최로 1947년 5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됐다. 군산에서는 채종철, 정석진 선수가 참가했다. 기라성 같은 선수 6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는 ‘올려다봐라 안창남, 내려다봐라 엄복동’의 세칭을 받고 있던 엄복동이 환갑의 나이로 참석, 선수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런던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 전형은 5일 오후 1시부터 청년 회관에서 위원회를 열고 신중하게 협의한 결과 12명을 결정하였는데, 군산 출신 정석진(鄭石鎭) 선수도 포함됐다. 정 선수는 최종 선발전 5000m[8분 53초 7]와 3000m[5분 06초 2] 두 종목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하였으며 500m 종목에서 2위를 차지한 채종철 선수는 아깝게 탈락하였다.

6·25 전쟁 이후 군산에는 사이클이 한동안 침체됐다가 1980년대 들어 몇몇 학교가 사이클부를 창단하고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하여 입상권에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됐으며 전국 규모 사이클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없어 안타깝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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