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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 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32
한자 群山落合精米所-職工罷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 3월 16일연표보기 - 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24년 3월 23일연표보기 - 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 파업 종료
발단 시기/일시 1924년 3월 - 군산낙합정미소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 임금 인하 단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3월 19일 - 군산낙합정미소 일본인 공장주 대체 노동력 투입
전개 시기/일시 1924년 3월 20일 - 군산 정미 인접 노동공동조합 교섭 실시
발생|시작 장소 군산낙합정미소 - 군산부 명치정통 38
종결 장소 군산낙합정미소 - 군산부 명치정통 38
성격 노동 운동
관련 인물/단체 군산낙합정미소|군산 인접 노동 공동 조합|군산 미선회

[정의]

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들이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임금 인하 철회를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개설]

일제 강점기 정미소 직공들은 일의 성격에 따라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매가리공은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않고, 그 쌀을 가마니에 묶어 짊어지는 일을 하던 남자 노동자들을 말한다. 미선공은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 가운데 좋은 쌀만 가려내는 직공으로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임금은 높지 않았으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일본인 공장주로부터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

군산낙합정미소(群山落合精米所)는 일제 강점기 군산에 본적을 두고 있던 정미소로 자본금 20,000원에 설립된 합자 형식의 회사이다. 1929년에 만들어진 『조선 은행 회사 요록(朝鮮銀行會社要録)』의 기록에 따르면 군산낙합정미소는 1928년 12월 15일 설립되어 정미업과 미곡 수출입을 하던 정미소였다. 1924년 3월 16일 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공 파업이 시작된 사실과 비교해 보면 설립일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이지만 설립 목적 등은 낙합 정미소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낙합 정미소에 종사했던 노동자들은 주변 농촌 지역에서 일본인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로 생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파업이 일어났던 1924년 낙합 정미소는 두 개의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제일(第一) 공장은 미선공이, 제이(第二) 공장은 매가리공들이 종사하고 있었고, 파업은 제이 공장에 있던 매가리공이 중심이 되어 발생되었다. 매가리공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여도 임금은 많지 않았으며, 적은 임금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반면 낙합 정미소 대표자인 오치아이 구라노스케[落合倉之助]는 값싼 한국인 노동자들을 부리며 이윤을 축적해 나갔다. 물가의 등귀로 인한 정미소 경영상 손실이 예상되면 직공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대처해 나갔다.

이런 공장주의 임금 인하는 정미소에 종사하는 매가리공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였기에 일방적 임금 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은 시작되었다. 1924년 3월 16일 발생된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 파업은 군산 지역 최초의 정미업 노동자의 연대 파업이었다.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들은 임금을 인하하겠다는 오치아이[落合]의 생각에 반대를 표하고, 자신들이 가입하였던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群山精米籾摺勞動共同組合)과 지역 내의 다른 정미소 노동자들과 협력하여 파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대응하여 오치아이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대체 인력을 투입하여 이들의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하지만 대체 인력 투입은 매가리공들의 방해로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지역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군산 경찰은 양측 대표자를 불러 타협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오치아이가 처음에 생각했던 임금 인하를 저지하고 일정 수준에서 타협을 보고 파업은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은 3·1운동 이후 사회 주의 사상 유입과 함께 활발히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이에 대한 인도 주의적 사회 일반의 여론과 분위기를 배경으로 노동 운동 단체의 활동은 활성화되었다. 노동 운동은 식민지 수탈과 관련된 원료 이출입이 많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고 지역별 노조에서 직업별 노조로 단체 성격이 변해갔다.

일제 강점기 초 일제는 쌀 이출을 위한 토지 조사 사업과 같은 사업 시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이윤 축적이 용이한 산업에 투자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쌀과 관련하여 전국 주요 쌀 산지에 생산 및 저장 시설들을 설립하고, 그곳에 한국인 노동자를 저임금로 고용하여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반대로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생계는 꾸리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공장주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자 하였고, 자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해고를 하거나 출근을 금지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미선업 노동자들은 같은 직종의 노동자끼리 단체를 조직하여 파업을 통해 탄압에 대항하였다. 1923년 5월 진남포 가등 정미소에서 200여 명의 선미공 파업과 1923년 8월 26일 인천 가등 정미소 직공 동맹 파업은 탄압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이런 노동 운동의 분위기는 일제 강점기 쌀의 집산과 이출에 큰 역할을 하였던 군산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자본가들이 세웠던 정미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 중노동, 민족적 차별과 탄압을 받는 등 쉽게 저항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정미업 노동자들은 군산 인접 노동 공동 조합이나 군산 미선회(群山米選會)와 같은 동일 직업의 노동 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탄압에 개별 및 연대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대응해 나갔다.

[경과]

낙합 정미소 대표인 오치아이는 정미소 직공들의 임금을 인하할 계획을 세웠다. 오치아이가 인하하고자 한 임금은 기존 임금이 80% 이상 삭감되는 것으로 매가리공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32명의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이 중심이 되어 1924년 3월 16일부터 군산 인접 노동 공동 조합의 지도를 받으며 파업을 진행하였다.

파업에 들어간 매가리공들은 오치아이와 교섭을 통해 해결을 시도하였지만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오치아이는 노동자를 압박하기 위해 1924년 3월 19일부터 지게 벌이 노동자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매가리공 작업에 투입하였다. 또한 계속해서 복귀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국인 노동자와 부산과 같은 다른 지역 노동자들을 불러 자신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는 협박을 진행하였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 파업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던 다른 정미소 인부들도 동맹 파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파업의 규모는 커지게 되었고, 파업자들을 대신해 매가리공 일을 하던 사람들도 쫓아내며 임금 인하를 저지하는 파업은 계속되었다.

오치아이와 군산 경찰은 동맹 파업을 중지시키기 위해 매가리공들에게 파업이 길어지면 노동자에게만 불리하고, 자본가인 정미소 주인은 타격이 없으니 복귀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파업 참여자들은 임금 인하를 철회하기 전에는 파업을 종료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파업을 진행하였다.

[결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기존 임금의 90%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안을 제안함과 동시에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40명 씩 3개조를 조직하여 오치아이의 낙합 정미소를 습격하였다. 그 결과 군산 경찰서에서 20명의 순사가 출동하여 파업 인부 40명을 구속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군산 경찰서에서는 파업 장기화를 염려하여 오치아이와 군산 인접 노동 공동 조합장 이세환 씨를 불러 타협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제시한 안이 수용되었고, 파업으로 인해 구속된 노동자들도 석방되었다.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매가리공들은 1924년 3월 23일 업무에 복귀하였고 파업은 종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의 파업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임금 인하 반대와 같은 경제적 요구였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경제적 요구에 그치고 있었지만 파업은 일본인 고용주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반 제국 주의 항일 투쟁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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