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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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在弼 |
영어음역 | Park Jaepil |
이칭/별칭 | 소여(少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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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 |
성별 | 남 |
생년 | 1884년![]() |
몰년 | 1957년![]() |
본관 | 고령 |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재필(朴在弼)[1884~1957]은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호는 소여(少旅)이다. 지금의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기열(朴璣烈)이며, 고령 지역에서 추앙받던 유림이었는데,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박재필은 선조의 묘역을 단장하기 위해 모인 문중 사람들 및 우곡면 도진리에 사는 박영화(朴英華)·박차천(朴且千) 등과 비밀리에 논의한 끝에 마을 사람 30여 명을 규합하고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에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우곡면사무소까지 행진해 갔다. 이때 참가한 사람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박재필이 나누어 준 태극기를 흔들며 밤늦도록 시위를 계속하다가 면장의 만류로 일단 해산하였다. 이튿날 박재필을 비롯한 박영화·박차천 등이 고령경찰서에 체포되어 박재필은 징역 1년 6개월, 박영화는 징역 1년, 박차선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