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3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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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범 |
출생 시기/일시 | 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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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83년![]() |
출생지 | 김영배 출생지 - 충청남도 공주시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국립공주박물관 관장 |
[정의]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학자.
[개설]
김영배[1918~1983]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참여하였으며, 제3대와 제5대 국립공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김영배는 1918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40년 보통학교 6학년 시절 입장료 5전을 내고 박물관을 관람한 후 틈만 나면 박물관을 찾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관리할 사람이 없게 되자 야간에도 숙식을 하면서 머물렀다고 한다. 미군정이 들어서자 김영배는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의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3대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을 역임하였고, 1969년부터 제5대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을 역임하였으며, 1975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이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하자 다시 관장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김영배는 회고를 통해 6·25전쟁 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 주변의 상황을 자세하게 언급하기도 하였다. 포탄이 날아와 박물관의 유리창이 박살나고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한다. 1·4후퇴 때에는 박물관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무령왕릉을 발굴할 때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도 김영배였다. 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 당시 김영배는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참여하였다. 김영배는 인부의 삽에서 벽돌이 드러나자 현장 작업을 중지하고 공주군청을 통해 문화재관리국에 상황을 긴급 보고했다. 김원룡의 증언에 따르면 백제사에 밝은 김영배가 작지만 힘에 찬 흥분을 억누른 소리로 사마가 무령왕이었다고 확인했다고 한다. 김영배는 왕릉 발견 전에 멧돼지 같은 짐승이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고도 말하였다.
김영배는 1979년 6월 국립공주박물관 관장직에서 퇴임을 하고 몇 년 간은 공주사범대학의 공산성 성내 유적 발굴을 지도하였다. 퇴임 직후인 1980년 5월에 작성한 한시에서 “나는 백제 땅에서 태어나 백제 강의 그림자가 되리라.”고 말하며 백제사에 헌신을 한 자신을 고마나루에 뿌려 달라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4년 국립공주박물관을 신축하면서 박물관 건물 뒤편에 김영배의 호인 우보(牛步)에서 따온 ‘우보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세웠다. 이는 초기 공주박물관 역사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고, 무령왕릉 발굴의 단서를 마련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