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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30013
한자 忠賢書院所藏朱子影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국고개길 24[중동 28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인수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7월 20일연표보기 -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에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현 소장처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충청남도 공주시 국고개길 24[중동 284-1]지도보기
원소재지 충현 서원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장터길 28-5[공암리 381]지도보기
성격 회화|초상
소유자 충현서원
관리자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주희의 초상.

[개설]

주희(朱熹)[1130~1200]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주자(朱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살아생전 초상화를 여러 차례 그리도록 했으며, 죽은 후에는 후학들이 그의 초상을 보고 그의 업적을 찬미하였다.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명나라 대부터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이나 『성현도(聖賢圖)』 화첩에 목판화로 초상이 수록되는 경우가 많았고, 석각으로 돌에 새겨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 안향(安珦)[1234~1306]이 성리학을 도입하면서 주희의 초상도 소개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서원에서 공자(孔子)와 더불어 주희의 초상을 많이 모셨는데,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그림이나 판화로 제작된 주희 초상을 기초로 그린 것이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 서원에는 모두 9점의 주희 초상이 전해졌는데, 충청남도 역사 문화 연구원에 기탁되어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 세워진 충청남도 최초의 서원으로 서기(徐起)[1523~1591]가 중국에서 가져온 주희의 초상을 모시기 시작하였다. 충현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주희 초상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이전 봉안하였다.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7월 2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에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형태 및 구성]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은 총 9점으로 제작 시기, 정황의 형식, 규모, 화풍, 자료 등에서 다양한 양상이 확인된다. 제작 시기는 18~20세기이다. 장황은 대부분 개장되었고, 족자와 액자의 장황 형식에 비단 또는 면에 그려져 있고, 형식은 반신상, 전신 좌상, 전신 입상 등이다. 또한 보존 상태는 유물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의 구성은 작자 미상의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1845년(헌종 11), 112.5×56.5㎝], 「회암선생주문공유상」[1709년(숙종 35), 112.7×58.9㎝], 「회암선생유상(晦菴先生遺像)」[97.0×46.2㎝], 「주자입상(朱子立像)」[91.5×50.5㎝], 「문공회암주부자진상(文公晦菴朱夫子眞像)」[84.5×47.2㎝], 「주자입상」[78.5×49.5㎝], 「주자입상」[78.4×46.9㎝]과 화승(畵僧) 안병문(安秉文)이 그렸다고 전하는 「주자입상」[1926년, 105.9×54.1㎝], 「주자입상」[1926년, 106.8×55.0㎝]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 9점 중 「회암선생주문공유상」은 가장 오래된 영정으로 보인다. 해당 영정의 보존 상태는 대체로 훼손이 매우 심하며, 최근 족자 형식으로 개장되었다. 영정의 상부에는 ‘회암선생주문공유상’이라는 표제가 있고, 좌우 부분에는 주자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었다고 알려진 ‘화상찬(畵像讚)’이 묵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숭정갑신후기축 후학 김진규근서(崇禎甲申後己丑 後學 金鎭圭謹書)’라는 관서(款書)가 확인되어 그림의 화상찬은 1709년 김진규에 의해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화승 안병문이 그렸다고 전하는 2점의 영정은 충현서원이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재건된 후 그 이듬해에 화승 안병문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전한다. 안병문이 제작한 2점의 영정은 20세기의 초상화법이 적용된 전신 입상(全身立像)으로, 서 있는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도상, 화법 등으로 제작되었다.

[특징]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은 모두 장기간에 걸쳐 제작된 작품들이며, 한곳에서 전해 내려왔다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비교적 많은 개모 사실기가 남아 있어 18~20세기 동안 장기간에 걸친 영정의 개모 사실과 변천사를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인과 현인들의 초상화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리학 연구의 근거지였던 서원에서 성현 초상을 많이 봉안했는데, 주희 같은 중국의 선현도 모셨던 것이다. 성현과 스승을 공경하는 맥락에서 주희 초상을 이용하는 것이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교훈적 그림이었던 것이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영정의 개모 사실과 변천사는 충현서원을 거점으로 형성된 사족 문화의 일면을 연속적으로 보여 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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