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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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彬旌閭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Yun Bi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통산로 200-3[송학리 13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박범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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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익공양식|홑처마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725년![]()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통산로 200-3[송학리 130-1]![]() |
소유자 | 윤영호 |
관리자 | 윤영호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문화재 지정일 | 2024년 5월 17일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효자 윤빈의 정려.
윤빈은 칠원윤씨 윤수(尹脩)와 단양우씨 사이에서 태어나 숙부 윤건(尹建)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깊어 주위의 칭찬을 자주 받았다. 이후 봉림대군의 사부를 지냈으며, 1650년(효종 1) 봉림대군이 즉위하자 서전(書傳), 강목(綱目), 주자의 주차(奏箚) 중 치국의 도와 관련된 구절을 추린 『고감록(古鑑錄)』을 바쳐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윤빈은 공주향교의 「향안」과 「청금록」에도 이름을 올렸고 공주의 대표 서원인 충현서원(忠賢書院)의 원장을 역임했다. 그 외에도 충청도 지역의 여러 서원 건립에 참여했는데, 1628년(인조 6) 계축옥사(癸丑獄事) 당시 무고로 인해 옹진으로 유배된 후 사망한 황신(黃愼)을 배향한 부여 창강서원(滄江書院)과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의 건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향촌 사회에서 매우 비중 있는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탄천면 소재지에서 부여 방면으로 50m 정도 가다 보면 정문거리가 나오는데, 윤빈 정려는 바로 도로변 오른쪽에 있다.
윤빈 정려는 대군사부를 지낸 윤빈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25년(영조 1)에 명정을 받아 세워졌다. 명정 현판에 의하면, 정려는 건립된 지 60여 년 후인 1788년(정조 12)에 중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판에는 중수 연도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중수 내역은 알 수가 없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관련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최근에는 1963년과 1975년에 후손들에 의해 중수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998년 공주시의 지원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윤빈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화강석 초석에 고주(高柱)가 세워져 있고 기둥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익공 계통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려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1788년(정조 12) 중수 때 다시 만든 ‘효자통훈대부대군사부윤빈지려숭정기원후삼무신사월일중수(孝子通訓大夫大君師傅尹彬之閭崇禎紀元後三戊申四月日重修)’라고 쓰인 현판과 해방 이후에 작성된 중수기 2기가 걸려 있다.
1963년 중수기(92㎝×30㎝)는 후손인 윤종관(尹鍾灌)이 짓고, 윤덕원(尹德遠)이 썼으며, 1976년 중수기(82㎝×40㎝)는 11대손인 윤상원(尹尙遠)이 지었다. 정려 외곽에는 초석 4기가 있는데, 예전 윤빈 정려의 규모가 상당히 컸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빈 정려는 1997년 6월 5일에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칠원윤씨는 본래 정산에서 대대로 세거하고 있었는데, 윤빈 정려는 정산에 세거하던 칠원윤씨가 탄천으로 이거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정확한 사연이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윤빈의 아들인 윤형재(尹衡在)를 비롯하여 후손들의 묘소가 탄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칠원윤씨는 윤형재 대를 전후하여 탄천으로 이거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