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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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惟泰 |
영어음역 | Yi Yutae |
영어의미역 | Yi Yutae |
이칭/별칭 | 태지(泰之),초려(草廬),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만년을 보낸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다. 1607년(선조 40)에 충청남도 금산군 노동리에서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이서(李曙)이다.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김집(金集)이 천거하여 1634년(인조 12)에 희릉참봉이 되었다. 이어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냈고 1660년(현종 1)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663년(현종 4) 균전사(均田使)·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고, 효종(孝宗) 즉위 후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1675년(숙종 1)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윤휴 등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5년 뒤 풀려나 공주시 중동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면서 충현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1684년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更張論)을 전개하였다. 또한 향촌 조직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실시, 양전(量田) 시행, 사창(社倉)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문집에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1659년(효종 10) 낙향하여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간하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고를 정서하는 때에 효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1660년(현종 즉위년) 조정에 제출한 「기해봉사(己亥封事)」와 「초려향약(草廬鄕約)」이 있다.
묘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 도림이마을 남단에 있다. 묘는 직경 약 8m로 일반 묘보다 다소 큰 편이다. 봉분 앞에는 ‘초려선생지묘정부인평산신씨부좌(草廬先生之墓貞夫人平山申氏祔左)’가 새겨진 상석과 좌우에 망주석 2기가 놓여 있다. 묘역에서 조금 떨어져 곳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1883년(고종 20)에 건립되었고 비문은 김상현이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1986년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가 만년을 보내고 후손들이 세거해 온 공주에 이유태를 배향하는 서원이 없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용문서원을 세웠다. 1988년 용문서원에 유물관을 신축하여 이유태의 유물과 관련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