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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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穆 |
영어음역 | Yi Mok |
영어의미역 | Yi Mok |
이칭/별칭 | 중옹,한재,정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박범 |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옹(中雍), 호는 한재(寒齋).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李伯由)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이윤생(李閏生)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아들은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이세장(李世璋)이다.
이목은 어려서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겨 행실에 힘썼으며 강개하여 높은 절개를 지녔다. 1489년(성종 20)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재생이 되었다.
1490년 성종(成宗)이 병환에 있을 때 대비가 무당을 시켜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음사(陰祀)를 설치하고 굿을 하자, 이목은 유생들과 함께 제단을 부수고 무당을 쫓아냈다. 대비가 노하여 죄주고자 하자 성종이 그 사람들의 명단을 모두 기록하게 하니, 유생들이 다 도망해 숨었는데 이목만은 숨지 않았다. 얼마 뒤 성종은 유생들을 처벌하지 않고, 성균관대사성을 불러 “그대가 학생들을 인도해 사습(士習)을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하고 어주(御酒)를 하사하였다. 당시 재상 윤필상이 남몰래 상에게 부처를 받들 것을 권유하니, 이목이 또 유생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죄 줄 것을 청하며 윤필상을 간귀라고 지목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친히 힐문하자 이목이 대답하기를 “그가 행한 바가 저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공주에 유배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전적(成均典籍)이 되었고,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496년 영안남도(永安南道)[현 함경남도의 옛 명칭] 병마평사(兵馬評事)를 거쳐 다음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되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신원되었다.
14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김굉필, 정여창 등과 동문이다. 24세 때 연경(燕經)에 가 중국의 다성(茶聖) 육우의 ‘다경(茶經)’과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탐독한 뒤 중국차 산지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귀국 후 「다부(茶賦)」라는 글을 통해 차와의 인연, 중국차의 품종과 산지 및 그곳의 풍광, 차 달이기[煎茶], 차 마시기[七修], 그리고 차의 오공(五功)과 육덕(六德), 다심일여(茶心一如)의 경지 등을 설파하였다.
문집으로 『한재문집(寒齋文集)』과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이목은 1581년(선조 14)에 공주에 건립된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전라북도 전주시 황강사(黃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552년(명종 7) 이조참판으로, 1707년(숙종 33)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