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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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福寺 |
영어의미역 | Black Snake and Heungboksa Temp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윤애 |
성격 | 불사연기전설|명칭유래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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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흥복|흥복 아내|검정 옷을 입은 노인 |
관련지명 |
김제시 흥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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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 유형 | 흥복의 가렴주구|흥복 아내의 선행|흥복의 개과천선 |
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에 있는 흥복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구렁이와 흥복사」는 김제시 백산면 흥사리[현 김제시 흥사동]에 있는 흥복사 중건에 관한 명칭유래담이다. 본래 흥복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末寺)로 650년 고구려의 고승 보덕대사가 창건하여 승가사라고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1625년(인조 3)에 흥복처사가 기원도량으로 삼아 극락전을 중건하고 흥복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그마한 암자였던 이곳에서 한 때는 도교가 성행하기도 했으나 많은 불교 고승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흥복사는 수령 600년 이상 되는 신단수와 설천(雪泉)으로 유명하다. 신단수는 둘레가 네 아름이 넘고 높이는 15m 이상의 고목이다. 설천은 항상 수량이 일정하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김제의 역대 원님들이 이 물을 길어다 마셨다고 한다.
전라북도 군산시 금광동 동국사의 본존불을 대불사하는 과정 중에 2005년 10월 30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발굴되었다. 이 책의 3권에 흥복사라고 하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1586년(선조 19) 폐사 직전의 승가사를 중흥시키는 과정에서 흥복사 관련 설화가 채집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제 지역의 향토학자였던 정진형이 채록하였으며, 그 내용은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http://www.gojb.net]의 전통문화 항목에 실려 있다. 이는 김제시 문화관광과에서 제공한 정보이다.
김제에 사는 흥복은 욕심이 많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로서 인근에 나쁜 평판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불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암자에 다니면서 열심히 부처님께 남편의 소행을 용서해 줄 것을 빌었다.
한 해는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은 배가 고파 고통을 받았지만 흥복이네는 오히려 곳간의 쥐가 살이 찔 정도라는 소문이 날 지경이었다. 원래 흥복은 욕심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이 없었지만, 흥복의 아내가 남편이 출타한 틈을 타서 자기 집 곳간을 열어 가난한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귀가하던 흥복은 다리를 건널 때에 갑자기 온몸이 으스스할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 다리 아래를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도사리고 흥복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려 도망친 흥복은 잠시 주막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흥복의 꿈에 검정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더니 “나는 잠시 전에 네가 본 구렁이다. 그런데 이제는 너와 내가 모양을 바꿀 때가 되었기에 너를 찾아왔더니 네 아내가 선행을 베풀고 있어서 내가 원통하게 악업을 벗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고 울면서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흥복은 자신의 악업에도 불구하고 착한 아내의 선행으로 자신이 구렁이 신세를 면하게 된 사실을 깨닫고 부인을 잘 받들고 불도를 열심히 닦는 사람이 되었다. 새 사람이 된 흥복은 열심히 불도에 전념하면서 선행을 쌓았다. 그 후 전 재산을 털어 이곳에 절을 지었는데, 흥복의 이름을 따서 흥복사라 하였다고 한다.
「구렁이와 흥복사」의 주요 모티프는 ‘흥복의 가렴주구’, ‘흥복 아내의 선행’, ‘흥복의 개과천선’ 등이다. 김제현감이었던 흥복은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는 관리였다. 그런데 그 아내의 선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개과천선하여 흥복사를 중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불사연기전설이다. 「구렁이와 흥복사」는 당시 관리들이 일삼던 무자비한 횡포를 풍자한 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