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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화합을 주도하는 노인회장 이달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B030203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마을의 화합을 주도하는 노인회장 이달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어린 시절〕

삼리1리 씩실마을은 광산이씨의 집성촌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이후 양촌 이난미에 의해 마을이 형성된 이래로 지금까지 광산이씨들이 마을의 중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전부터 다른 성씨도 일부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 이달우 회장은 지난 2015년부터 노인회장을 맡아 마을의 화합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달우 회장은 1937년 씩실마을에서 4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낙동강 제방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여름만 되면 홍수피해를 입었기에 마을 주민의 생활은 형편없이 어려웠다고 한다. 동네에 학교가 없어 10리쯤 떨어진 논공읍 하리의 약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다닐 때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6.25 전쟁 때는 청도 쪽으로 피난을 잠시 다녀왔다. 피난 갔다 온 마을은 다행히 폭격을 피하였다고 한다. 미군이 주둔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삼리들과 승호에는 북한군 시신이 엄청나게 널려져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토마토로 이겨낸 가난〕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은 하지 못했다. 당시 홍수 피해로 먹을게 없으면 피죽을 끓여 먹기도 하였다. 양말 짜는 기계를 집에 두고 생계를 이어가던 중 1958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 취미로 사진을 찍기도 한 그는 1군 사령부 사진반에서 3년간 군대생활을 아주 편하게 하였다.

“광주 통신학교에서 12주 교육을 받을 때 사진 기술을 처음 배웠어요. 군대 있을 때 사진촬영 자세가 좋다고 해서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실물크기로 인화해서 대대장실에 붙여 놓았더라고...”

1960년 제대 후 대구 내당동에 있던 부인사진관에서 2년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형제와 더불어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 때가 논공 일대 낙동강 제방공사가 마무리되고 양수기가 설치되면서 삼리들의 농사환경이 많이 좋아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씩실마을 출신으로서 서울대 농대를 나온 이원경의 주도하에 수박농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달우 또한 밭농사를 하는 가운데 수박과 참외농사를 함께 하였다. 처음에는 보리를 넓게 심어 놓고 그 사이에 수박이나 참외를 심는 방식이었다.

“비닐도 없으이 노란 종이 가지고 고깔을 만들어 씌웠지. 그래 하다가 비닐 나오고 난 뒤에 골을 넓게 해서 대나무를 쪼개 가지고 땅에 꽂아서 비닐터널을 만들어 하다가 나중에 하우스로 했지. 철제하우스가 아마 새마을 운동 할 때 나왔을 거라 아마...”

수박농사를 통해 농업기술을 익힌 그는 토마토 재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군대 복무 중 결혼한 그는 2남 3녀를 두었다. 셋방살이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토마토 농사를 통해 자녀들 모두 국내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잡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였다.

〔마을의 화합을 위해 일하는 노인회장〕

이달우는 귀향한 후 마을의 새마을운동에서부터 문중의 일들에 적극 참여하였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같은 집안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지내왔다. 그런 가운데 2015년부터 노인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노인회가 생긴 게 1980년대부터로 생각 되요. 초대 노인회장이 이달협씨라고 집에 큰 형님이고... 회장은 광산이씨 뿐 아니라 마을의 다른 성씨를 가진 주민들도 했어요. 정차준씨라고 요기 안건마을 사람인데. 회장은 총회에서 추천해서 정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같은 집안사람들 이어서 활동에 있어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허물은 서로 감싸주면서 친목을 도모하면서 그리 지내지요”

씩실마을 노인회 회원은 50여명인데 부녀회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 1명, 그리고 감사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인회에서는 달성군의 여타 노인회와 마찬가지로 정부로부터 연간 6백만원과 쌀 20kg들이 7포대를 지원받고 있다. 자체 회비는 없으며 행사 때 마다 찬조금을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매년 두 번의 야유회를 통해 친목을 도모한다. 그리고 이장이 주도하는 마을의 정월대보름 행사에도 함께 참여한다. 새마을회와 부녀회가 후원하는 효도 관광을 가기도 한다.

마을회관을 노인회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1976년 새마을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씩실마을은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모범부락으로 주목받고 있었으며, 그 성과 가운데 하나가 마을회관 건립이었다. 지금의 노인회관은 2012년 마을 주민과 군의 협조로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정보제공자〕

이달우 (남, 1937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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