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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종손 김해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30302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종손 김해순

[청도김씨 교리공파 입향조 13대 종손]

다리목 마을의 청도김씨는 ‘교리공파(校理公派) 교향계(橋項系) 문중’으로 일컬어진다. 한 곳에서 400년 넘게 지내오는 동안 입향조로부터도 벌써 15세, 16세손까지 태어났다. 청도김씨 교리공파 자손들만 전국적으로 1,000여 호에 이른다. 달성군 관내로는 다리목 마을을 중심으로 옥포읍 강림리, 법화리, 본리리를 비롯하여 논공면 등지에 산재한다.

현재 청도김씨 교리공파 종손(宗孫)은 입향조 창원공(昌元公)의 13세손인 김해순(金海純)으로 종친회 총무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그는 문중 성원들과 힘을 합쳐 입향조 추모 공간인 구목당(九睦堂)을 중심으로 입향조 향사(享祀)를 비롯하여 화수회, 문중 이사회 등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부친의 도일과 일제 강점기 일본 출생]

김해순 종손은 1943년 3월 21일(양력) 일본에서 3남매(2녀 1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제 강점기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가게 되어 일본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20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큰 누나를 한국에 남겨두고 도일(渡日)하였다. 4살 터울의 바로 위 누나는 일본에서 출생했으므로 아버지의 도일 시기는 1930년대 후반쯤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비록 말단이지만 공장에서 생산직 관리자로 일하며 상당한 돈을 벌었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번 돈으로 농지를 구입하여 2명의 동생들까지 지원했다. 한 마을에 살던 삼촌들이 집안일을 돌봐주는 바람에 생전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 그가 20세에 결혼하자 삼촌들은 모든 일을 맡기고 물러났다.

[고향을 지키면서 농사와 사업까지]

그는 고향에서 학교를 마치고 줄곧 다리목 마을에서 생활했다. 객지생활은 20세 결혼 후 딱 1년 동안만 대구로 나가 산 것이 전부다. 참외 농사도 2005년까지 10여 년 동안 지었지만, 대부분은 종부인 아내와 함께 포목 판매 사업에 종사했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비단이나 수의 등을 도매로 구입하여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의 전국으로 다니면서 팔았다. 이 일을 30세 무렵부터 시작하여 근 30여 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번 돈으로는 대구에 점포를 구입하여 임대사업에 재투자했다. 하지만 재래시장이 위축되어감에 따라 부동산 가치가 차츰 하락되는 상황에서 일찍 순환 투자를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그래도 고향을 지키면서 3남매를 잘 키워내고 건강하게 살아 나옴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종손의 권위보다는 함께하는 문화로]

그의 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접빈객(接賓客), 봉제사(奉祭祀) 등 종손으로서의 역할이 상당하여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손님이 오면 주로 집에서 식사와 숙식 등을 제공했다. 경상북도 하양에 김씨 원종손이 살았으므로 청도나 하양 등지에서 묘사 때마다 종친들이 다리목 마을을 찾았다. 아버지는 지금의 구목당 재실을 복원할 때도 종손으로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전에 아버지가 종손으로 계실 때는 청도나 하양에서 여기로 묘사 지내러 오면 우리집에서 묵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손님 치느라 집사람이 애를 먹었습니다. 그때는 아궁이에 불 때가 밥을 하던 시절 아닙니까. (구목당을 가리키며) 이 재실 새로 지을 때도 밥 많이 해주고. 그때는 나무도 산에서 베어다가 지었는데, 아버지가 신경을 많이 썼지요. (크게 웃으면서) 종손이라도 일 많이 치르는 것밖에 없어요. 손님이나 많이 치고.”(김해순)

지금은 생활환경의 변화로 인해 종손의 역할도 많이 바뀌었다. 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의 경우 문중 일은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꾸려나간다. 입향조 향사를 비롯한 묘사 봉행과 재실 관리 등 제반의 문중 일은 종친회를 통해 해나간다. 접빈 역할도 종친회 중심으로 하되, 가정이 아닌 식당에서 해결한다. 그의 말대로 종가집이라고 해서 손님 치는 일도 없고, 완전 현대식으로 바뀐 셈이다. 종손으로서의 짐이 가벼워진 탓인지 그의 너털웃음이 한층 밝아 보인다.

“지금은 옛날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문중 일은 다 함께 합심해서 해나갑니다. 또 조금이라도 경비 드는 것은 문중에서 다 대주고. 혹시 손님이라도 오면 식당으로 모시지, 옛날처럼 가정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종가집이라고 해서 손 치는 것도 없고. 완전 현대식으로 바뀌었지요.”(김해순)

[참고 문헌]

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略史記』(2008)

[정보 제공자]

김해순(남, 1943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향계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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