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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지 축조와 유정지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20303
한자 柳亭池 築造- 柳亭池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유정지 축조와 유정지계

[교항들의 젓줄, 유정지]

유정지(柳亭池)는 다리목 마을의 간선 도로격인 5호선 지방도 아래에 위치한 저수지 명칭이다. 버드나무 ‘유(柳)’ 자의 유정지 명칭은 예전 못 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서식한 데서 유래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버드나무 ‘유’ 자와 못 ‘지’ 자를 한글로 소리 내어 일컫는 ‘버정못’ 명칭이 더 익숙하다. 유정지와 연해 있는 ‘버정등’ 동산 명칭도 이로부터 붙여졌는데 ‘지내(池內)등’, ‘못안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유정지는 인근 금계산(金鷄山)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저장해두었다가 버정못 밑, 구불등, 시부골, 푸새미 등을 아우르는 못 아래 넓은 다리목 마을 들판을 적셔주었다. 교항들의 젓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수 용량은 몽리(蒙利) 토지 약 10,000평에 물을 댈 수 있는 규모다.

[유정지 조성과 영운 김공 영찬 송덕비(英雲 金公 永贊 頌德碑)]

다리목 마을 원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정지는 일제 강점기이던 1930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정지 주변 농토는 지형상 수원지인 낙동강이나 선녀곡 등의 산간 계곡과도 거리가 멀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저수지 축조가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다리목 마을 출신인 영운(英雲) 김영찬(金永贊, 1894-1955) 옥포면장의 다각적인 지원으로 마을 주민들은 울력으로 유정지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 만삭의 다리목 마을 아낙네가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 현장에 점심밥을 나르다가 들판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趙) 씨 성을 가진 아이의 이름이 ‘들만’으로 지어졌는데, 현재 86세라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딱 86년 전인 1930년 무렵이다.

유정지 몽리 지주들은 김영찬 면장의 덕을 기리고자 1955년 버정등의 묘소에다 송덕비를 세웠다. 송덕비는 2002년 묘소가 논공면 남동 사촌 명마곡으로 이장할 때 함께 옮겨졌다.

“유정지는 1930년 무렵 조성되었습니다. 나의 백부이신 김영찬이라는 당시 옥포면 면장의 역할이 컸습니다. 다리목 마을 입향조의 14세손입니다. 사후 몽리 지주들이 송덕비까지 세워줬습니다.”(김만채)

“유정지가 일제시대 만들어졌지요. 이름이 ‘조들만’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들에서 낳았다고 해서 ‘들만’이지요. 못 만들 당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가 이고 가다가 급해서 그냥 들판에서 애를 낳았답니다. 그 사람이 올해 86세 나이니까 86년 전이지요.”(김선린)

[유정지계 결성과 수원지 관리]

유정지 아래 농토를 가진 사람들은 못 축조 이후 이의 효율적인 유지와 관리를 위해 유정지계(柳亭池契)를 조직하였다. 유정지계에는 회장과 총무를 두어 관리의 책임을 맡도록 했다. 유정지계를 결성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못 완공 시기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번기 물을 대기 위한 수문(水門) 개폐와 물길 유지는 당장 축조 이듬해부터 관리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유정지 관리를 위해 계를 만들었지요. 내가 처음 참여할 때만 해도 계원이 100명이 넘었지요. 수세도 받고 해서 기금을 모으고요. 매년 총회도 열어 계원 간 단합도 도모하고 사업 결산도 하고. 이후로는 토지가 차츰 외지인에게도 팔려 나가 지금은 실제 모이는 인원이 25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송삼식)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정지계 구성원은 100여 명을 넘었다. 소유하는 몽리 면적 당 일정 액수의 수세(收稅)도 거둬 상당량의 기금도 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수문 개폐와 물 대기 등 제반의 물 관리를 책임지는 인력인 수반(水班)을 두기도 했다. 수반은 몽리 토지 소유자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물대기가 필요한 농사철에만 제한적으로 고용되었다.

[유정지계의 변화]

유정지계는 일종의 수리계(水利契)로서 계원들은 매년 여름 모내기 이후 이팝나무 숲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총회에서는 주요 안건을 의논하고, 한 해 사업 내용을 결산했다. 예전에는 돼지도 한 마리 잡는 등 성대하게 했다. 하지만 농업 가치가 떨어지고 농지가 외지인에게 차츰 팔려나감으로써 이제는 참여자도 25명 내외로 크게 줄어들었다. 도중에는 유정지계를 법인으로 만들려고도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지금은 월 150~200만원의 고정 급여를 대주면서 수반을 고용할 상황이 되지 못해 2015년 6월부터는 다리목 마을 이장에게 관리권을 넘겼다. 이장은 명목상의 대표일 뿐 실질적인 관리 책임과 권한이 없어 유정지와 유정지계 조직의 관리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그래도 유정지는 여전히 가뭄으로부터 교항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원(水源)이다. 비록 많이 약화되기는 했을지라도, 유정지계 또한 수리계의 전통을 잇는 소중한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참고 문헌]

<英雲 金公 永贊 頌德碑>

[정보 제공자]

김선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김외상(남, 1935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유정지계 회장)

김해순(남, 1943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종손)

송삼식(남, 1947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유정지계 회장)

김만채(남, 1948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강림리,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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