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골병들이 부자들로 변한 마가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20102
한자 -病- 富者-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골병들이 부자들로 변한 마가들

[낙동강이 마을 앞까지 흘렀던 증거, ‘도선납’ 지명]

다리목 마을은 현재 제방 공사가 이루어져 마가들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과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오래 전에는 낙동강물이 마을 가까이로 굽이쳐 흘렀다. 마을의 여러 지명과 지형적 특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옛날에는 낙동강이 우리 동네 쪽으로 붙어 있었어요. 들이라는 게 옛날에는 모두 강(江) 밖으로 나가 있었어요. 들의 호칭이 많이 있거든. 한 가지로 ‘도선납’이라는 호칭이 있어요. 옛날에는 강이 이쪽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배가, 도선이 있었지요. 도선이 있었다고 ‘도선납’ 지명이 있는 것이지요. 배를 대는 나루터, ‘도선 앞’이지요.”(김0린)

마을 아래쪽을 일컫는 ‘도선납’ 지명은 그 증거가 된다. 도선납은 ‘도선(渡船) 앞’ 명칭이 소리 나는 대로 발음된 것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배(舟)를 대는 나루터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오래 전에는 낙동강물이 마을 부근까지 흘러 나룻배가 사람들을 싣고 건너편의 고령은 물론 강물을 거슬러 화원(花園), 강창(江倉)까지 운항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낙동강 토사가 만들어낸 마가들]

다리목 마을 주변에 산재해 있었던 씩늪, 한늪, 진늪, 선늪, 가마늪 등의 여러 늪지대도 일대에 낙동강물이 흘러 다녔던 흔적이다. 오랜 세월 낙동강 토사가 쌓여 마가(馬家)들이 형성되고 물길이 바뀌면서 일부가 늪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진늪과 선늪, 가마늪 등은 다리목 마을 북쪽에 있다. 진늪은 길이가 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처음에는 경상도 발음으로 ‘질늪’이다가 후에 ‘진늪’으로 일컫게 되었다. 선늪은 늪 주위의 산과 들이 섬(島)처럼 생겼다고 하여 처음에는 ‘섬늪’이다가 다시 ‘선늪’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들 세 개의 늪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馬)씨들이 터를 잡은 동네, 마가들]

‘마갯들’이라고도 부르는 마가들은 다리목 마을 북쪽 낙동강 유역에 형성되어 있는 광활한 들판을 일컫는다. 마가들 명칭은 본래 마(馬)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마가(馬家)골’, ‘마가야(馬家野)’, ‘마인곡(馬人谷)’, ‘마잉골’ 등으로 불렀다. 이곳은 본래 황무지였으나 마씨들이 들 전체를 소유하여 경작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어 농사짓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은 마씨들은 살지 않고 들만 남아있다.

마가들은 땅바닥이 낮아 여름 장마철에는 낙동강이 자주 범람하여 벼농사를 하기는 힘들었다. 정성들여 가꾸어 놓아도 비만 오면 물을 담아 농사를 망치곤 했다. 홍수가 드는 경우에는 마을까지 물에 잠겼다. 따라서 보리나 마른 땅에서 자라는 나락인 산도(山稻), 장밀, 콩 등의 밭작물을 주로 재배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 보리 생산을 장려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장마 져서 물 담았지. 물 담아버리면 나락 심어놓은 거 다 허탕이라. 어

떻게 운 좋은 해는 나락 농사 조금 건지고. 그러이 나락농사는 못 짓는 기라. 1963년 제방공사 후에는 조금씩 해먹었지. 그 전에는 보리나 산도, 장밀, 콩 등을 주로 심었거든. 1965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마을이 잠기기도 했는데. 저 아래쪽 사람들은 비상 대기하고 그랬지.”(최0향)

[골병들이 이제는 옥토로 바뀌어]

‘큰들’이라는 다른 명칭처럼 마가들은 규모가 엄청나 다리목 마을의 것만도 300여 정보에 이른다. 1960년대 낙동강 호안공사 이전에는 규모만 컸을 뿐 노력에 비해 소득 없는 들판이어서 ‘골병들’로 통했다. 농사는 오로지 하늘의 뜻에 달렸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의 결과에 순응적이었다. 다리목 마을 사람들을 일컬어 “마음이 너르다”거나 “노동에 대해 강한 정신이 있다”라는 말들은 이를 두고 이름이다.

낙동강 제방이 튼튼하게 마무리된 이후부터는 넓은 마가들이 옥토로 변하였다. 유기질의 충적 토양으로 땅이 기름져서 벼 수확이 풍성하였다. 외부로부터 인구 유입도 늘어났다. 1960년대 이후에는 참외를 비롯하여 수박, 토마토, 멜론 등의 특작 농사가 성하여 많은 소득을 안겨준다.

[참고 문헌]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 『달성 마을지』(달성 문화원, 1998)

대구 광역시ㆍ택민 국학 연구원, 『대구 지명 유래 총람』(2009)

[정보 제공자]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최0향(여, 1935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교항리 다리목 마을)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