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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의 리더십과 마을 근대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10202
한자 先覺者- 近代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선각자의 리더십과 마을 근대화

[수리와 농지 관리의 지도력]

달성군 옥포읍의 재적자 명부를 떼보면 다리목 마을 출신자가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유는 교육열이 높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대구를 비롯하여 서울, 부산 등 대도시로도 많이 나가있다.

다리목 마을에서는 광복 전후 시기부터 민선 면장과 농협장을 비롯하여 면 의원, 교육위원, 수리조합 평의원 등의 지역 유지들도 더러 배출되었다. 입후보해서 당선된 사람들 중에는 감투 욕구보다는 지역 발전을 위해서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가면서 마을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군의원이나 면의원 등은 행정 조율을 위해 나선 사람들이지만, 수리 조합 혹은 농지 개량 조합, 토지 개량 조합 등의 평의원은 농사에 필요한 수리(水利)나 농지 관리 등의 일을 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택 영단, 식량 영단 등과 같이 연못이나 양수장의 축조 및 관리 업무를 보는 ‘영단(營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후에는 농촌공사로 통합되었지만, 이와 같은 수리 혹은 농지 관련 단체의 평의원들은 다리목 마을의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다. 이들 평의원들의 선출과정도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었다.

[마가들 수로 개설]

광복 이후 다리목 마을 근대화를 이끈 선각자 중의 한 사람으로 성산 이씨 고 이만수(李萬壽) 선생을 들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도일(渡日)했다가 광복 후 귀환했다. 이후 옥포 수리 조합 평의원에 당선되어서는 한 세대를 앞서 내다보는 혜안으로 일찍부터 다리목 마을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대 혁신을 강조하면서 광범위한 농토 보유지로서의 특성을 감안한 근대화 방안을 내놓았다. 당시로서는 광개들을 비롯한 동네 위쪽 국도변의 농토는 가뭄 시에 농수(農水) 공급이 어려워 농사를 자주 망쳤다.

“우리 마을 공로자입니다. 살았으면 120세는 족히 됩니다. 원래 이 어른이 일본에서 8.15 해방이 되어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와가지고 자기 재산을 마을에 희사해가면서 농촌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나도 당시 동네 구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많이 압니다. 한 대(代) 후를 멀리까지 생각했다고나 할까요.”(김0린)

그는 수리 조합 평의원을 역임하면서 우선 농수를 원활하게 공급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관계 기관으로부터 수로 설치 공사비도 따왔다. 공급할 농업용수는 10리 이상 떨어져 있는 기세리 옥연지(玉蓮池)로부터 수로를 통해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그는 물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직선 수로를 계획했지만, 수로가 지나가는 농지 주인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에 자신의 문전옥답을 선뜻 내놓아 맞바꾸는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마가들 경지 정리]

다리목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가들의 농수 공급과 더불어 경지 정리 사업도 농업 근대화를 위한 필수 사안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마가들 경지 정리 사업도 이만수 선생의 혁신적 발상과 추진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는 1960년 마가들 경지 정리 사업을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쌀 두 가마로 노잣돈을 마련한 후 상경하여 농림부 장관실을 두드렸다.

이로부터 3년 후 비로소 농림부로부터 경상북도를 경유한 긍정적인 답변이 전달되었다. 곧바로 경지 정리 경험자였던 제10대(1963.12~1967.10) 김인(金仁) 경상북도 도지사의 지시로 농촌 근대화 촉진법에 의해 마가들 경지 정리 사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되는 경지 정리 사업이었다. 300정보에 달하는 광활한 농지가 반듯하게 변함으로써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마가들을 옥답으로 가꿔나갈 수 있었다. 농가 소득도 이전보다 3-4배로 크게 증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의망을 안겨주고, 자녀 교육과 환금작물 재투자, 마을 공동사업 등 마을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수로 공사에다 이제는 경지 정리까지 됨으로써 동민들은 말은 안 해도 ‘아~ 이제 살았구나’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죠. 옛날에는 콩 심어가지고 헛 노력하다가 이제는 모를 숨궈가지고 생산이 옛날보다 3배, 4배 더 나거든요.”(김0린)

[정보 제공자]

김0태(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 전 회장)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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