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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54
한자 李允宰
영어공식명칭 Lee Yunjae
이칭/별칭 환산(桓山),한뫼,한메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이윤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이윤재 김해 공립 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이윤재 김해 합성 학교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이윤재 마산 창신 학교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이윤재 마산 의신 여학교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윤재 영변 지방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31일 - 이윤재 3·1 운동으로 징역 1년 6개월 선고받고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1년 6월 - 이윤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1년~1924년 3월 - 이윤재 중국 베이징 대학 사학과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이윤재 수양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9월 - 이윤재 정주 오산 학교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윤재 계명 구락부의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8월 - 이윤재 조선어 연구회 기관지『한글』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윤재 조선어 학회 『우리말 사전』 편찬 수정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윤재 우리말 표준어 사정회 수정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이윤재 조선어 연구회 집행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이윤재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 집행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이윤재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월 - 이윤재 조선어 학회 상임 감사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이윤재 연희 전문학교 조선어 교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이윤재 조선어 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0년 3월~1930년 9월 - 이윤재 『동아 일보』에 「대성인 세종 대왕」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0월~11월 - 이윤재 『동아 일보』에 「성웅 이순신」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2월 - 이윤재 『신생』에 「동방의 위인 이이 소전」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1월 - 이윤재 『신동아』에 「강감찬의 귀주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0월 - 이윤재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및 발표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4년 7월 - 이윤재 진단 학회 창립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이윤재 감리교 신학교에서 강의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이윤재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의 사정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이윤재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의 편찬 전임 집필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6월 - 이윤재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약 1년 6개월간 옥고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이윤재 대동 출판사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40년 4월 - 이윤재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6월 - 이윤재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이윤재 기독 신문사 주필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 - 이윤재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
몰년 시기/일시 1943년 12월 8일연표보기 - 이윤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45년 10월 9일 - 이윤재 추도식 개최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이윤재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묘소|단소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성격 독립운동가|국어학자|역사학자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경력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 집필 위원|기독 신문사 주필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국어학자·독립운동가·역사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환산(桓山), 한뫼·한메. 아버지는 이용준이다.

[활동 사항]

이윤재(李允宰)[1888~1943]는 1888년 경상남도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6살 때인 1894년부터 고향에 있는 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8년 늦은 나이인 20살에 김해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해 합성 학교(合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았고, 국권 회복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육 계몽 운동에 동참하였다. 대구에 있는 계성 학교(啓聖學校) 고등과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 이윤재는 조선어 권위자인 주시경(周時經)에게 사숙을 받으면서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1913년 마산 창신 학교(昌信學校), 1917년 마산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를 거쳐,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 학교(崇德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숭덕 학교 재직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변 지방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1919년 7월 31일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마산으로 돌아와 있다가 1921년 6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1921년부터 1924년 3월까지 중국베이징 대학[北京大學] 사학과(史學科)에서 공부하였다. 베이징 대학에서 수학 중에도 국내에서 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인 『동명』에 「중국의 새 문자」, 「몽고 민족의 독립운동」, 「중화민국 의회 소사」, 「북경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정계와의 충돌」, 「경한철(京漢鐵) 종업원 총동맹 파공(罷工)의 전말」, 「호적(胡適) 씨의 건설적 문학 혁명론」, 「민중 혁명화하는 중국의 학생 운동」 등 주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 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인 1924년 9월에는 정주 오산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수양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도 협성 학교, 배재 학교, 동덕 학교(同德學校), 중앙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계명 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을 보전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빛』을 편집·발행하였다. 1927년 8월 이윤재는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다."라고 통탄하면서 조선어 연구회의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여 조선어 연구의 대중적 전파와 보급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의 『우리말 사전』 편찬 수정 위원, 이어 우리말 표준어 사정회 수정 위원(標準語査定會修正委員)이 되어 한글 보급과 겨레의 얼을 고무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다른 국어 학자들과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는 한편, 사전을 편찬하는 등 국어 보급을 통한 민족 운동에 헌신하였다.

1929년 조선어 연구회,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의 집행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0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위원이 되었다.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학술적 책임을 맡은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 학회로 확대·발전하였는데, 이때 상임 감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 연희 전문학교뿐 아니라 동덕 여자 고등 보통학교, 경신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31년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 일보사와 조선 일보사 등이 주최한 하기 한글 강습회에 참여하여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 학회의 기관지로 복간하는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다. 1930년 3월부터 9월까지 『동아 일보』에 28회에 걸쳐 「대성인 세종 대왕」을, 1930년 10월부터 11월까지는 25회에 걸쳐 「성웅 이순신」을 발표하였다. 1931년 2월에는 『신생』에 「동방의 위인 이이 소전」, 1931년 11월 『신동아』에 「충의 의인 민충 정공」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1933년 10월 이윤재가 작성 위원으로 참여한 조선어 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및 발표하였다. 1934년 7월에는 역사 및 한글학자들과 함께 순수 학술 단체인 진단 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였다. 1935년 감리교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의 사정 위원이 되었다. 1936년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회의 편찬 전임 집필 위원이 되었다. 1937년 6월 수양 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연루되어 서울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약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대동 출판사(大同出版社)에서 근무하였다. 1940년 4월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성안하여 발표하였다. 1940년 6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1941년 기독 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 보급과 우리말 사전 편찬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윤재를 비롯한 한글학자들의 활동은 당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충돌하였다. 결국 1942년 10월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이윤재를 비롯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함경남도홍원 경찰서 형사들에게 피체되었다.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이었다. 일제 당국은 이윤재를 비롯한 조선어 학회 회원들에게 "민족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 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 형태(漸進形態)이다."라고 하여 「치안 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이윤재는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인 1943년 12월 8일 새벽,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윤재의 저서로 『성웅 이순신(聖雄李舜臣)』[1931], 『문예 독본(文芸讀本)』[1931·1932], 『문장 독본(文章讀本)』, 초역한 『도강록(渡江錄)』, 『표준 한글 사전』[1947, 유고] 등이 있다. 편저로는 『한국 문자급 어학사(韓國文字及語學史)』, 『조선어 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등이 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광나루에 마련되었다. 그 후 유족들이 모두 대구광역시로 내려옴에 따라, 1973년 3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속칭 돌산 중턱으로 이장하였다. 이윤재의 묘 앞에는 한글 학회가 세우고, 한글학자 김윤경이 쓴 비문이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순한글 비석으로,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비문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1945년 10월 9일 함흥 형무소에서 사망한 조선어 학회 회원 이윤재와 한징(韓澄)의 추도식이 열렸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윤재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김윤경, 『한뫼 선생』(신천지, 1954)
  • 『한글 학회 50년사』 (한글 학회, 1971)
  • 『대구의 뿌리 달성』 1-달성을 되짚다(달성문화재단·달성군지간행위원회, 2014)
  •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http://search.i815.or.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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