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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배선[달성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50
한자 禹拜善[達城郡]
영어공식명칭 Woo BaeSeon
이칭/별칭 사성,월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9년 2월 2일 - 우배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3년 5월 - 우배선 군자감 정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594년 9월 - 우배선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595년 7월 - 우배선 임진왜란 군공으로 합천 군수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우배선 합천 군수 사직
활동 시기/일시 1599년 10월 - 우배선 대구 향교의 이건을 향우들과 논의함
활동 시기/일시 1600년 3월 - 우배선 금산 군수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우배선 금산 군수 사직
활동 시기/일시 1603년 3월 - 우배선 낙안 군수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04년 5월 - 우배선 낙안 군수 사직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우배선 선무 원종공신 1등에 녹권됨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우배선 겸사복장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우배선 경상 좌수영 우후로 좌천됨
활동 시기/일시 1611년 3월 - 우배선 경상 좌수영 우후 사임
몰년 시기/일시 1621년 11월 23일 - 우배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08년 - 우배선 덕동 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65년 - 우배선 낙동 서원에 배향
출생지 우배선 출생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거주|이주지 우배선 외가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활동지 우배선 활동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활동지 우배선 활동지 - 경상남도 합천군
활동지 우배선 활동지 - 충청남도 금산군
활동지 우배선 활동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읍
묘소 우배선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낙안 군수

[정의]

조선 후기 달성과 화원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 고조할아버지 우전(禹奠)은 예빈시 주부를 역임하였으며, 처음으로 화원현 월촌에 정착하였다. 고조할머니는 정순(丁淳)의 딸 영광 정씨(靈光丁氏)이다. 증조할아버지 우계강(禹啓江)은 장연 현감(長淵縣監)을 지냈고, 증조할머니는 진사 김창(金昶)의 딸 서흥 김씨(瑞興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함평 현감(咸平縣監) 우봉(禹鳳)이며, 할머니는 목사 정역(鄭櫟)의 딸 영일 정씨(迎日鄭氏)이다. 아버지 우성덕(禹成德)은 본래 우붕(禹鵬)의 넷째 아들로 큰 아버지 우봉에게 출계하여, 충순위로서 일찍 죽었다. 우성덕의 부인이자, 우배선의 어머니는 아산 장씨(牙山蔣氏)이다.

우배선의 할아버지 삼형제 우봉, 우붕, 우린(禹麟) 형제는 각기 수령, 군직을 역임하면서 화원현을 중심으로 인근 군현의 재지 사족인 아산 장씨[풍각], 대구 배씨, 광주 이씨, 팔거 도씨, 서흥 김씨[현풍]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배선의 첫째 부인은 태종 대에 우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의 5세손인 이탕(李宕)의 딸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며, 두번째 부인은 한훤당 김굉필의 증손자인 김수열(金壽悅)의 딸 서흥 김씨이다.

[활동 사항]

우배선(禹拜善)[1569~1621]은 달성군 화원현 월촌 출신인데, 당시 화원은 성주목 관할이었지만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4월 21일에 왜군이 대구에 입성하였다. 이때 대구 읍내 군민 2,000여 명은 팔공산 등지로 피신하였다. 우배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대구와 인근 지역이 피해를 입자 5월 23일 통문을 돌려 양반·중인·양인·노비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50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한 뒤 화원현에서 거병하였다. 부대의 구성은 대장을 비롯해 야장(冶匠), 시인(矢人), 궁수(弓手), 창수(槍手), 포수(砲手), 산척(山尺)[사냥꾼] 등으로 다양하였다. 그의 격문을 본 일부 백성은 “우모(某)가 장차 죄 없는 사람을 다 죽이겠다”고까지 했다. 우배선은 소수 정예 부대를 이끌고 1592년 6월 비슬산에서 20여 명의 왜적을 베었으며, 이어 7월에는 낙동강 여울에서 적병 30명을 사살하였다. 11월과 12월에는 화원, 고령, 성주, 대구, 비슬산, 최항산(最項山), 낙동강 일대에서 게릴라 전술로 수백 명의 왜적을 사상시키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92년 12월에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3년에도 계속해서 용감히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3월에 군기시 주부, 4월에 군기시 판관이 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서 5월에 군자감 정에, 1594년 9월에는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1595년[선조 28] 7월에는 전란 초기의 의병 활동으로 인한 군공이 인정되어 합천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596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 후 1600년 3월에 왕의 특명으로 금산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602년 사간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의 유망 사태를 빚는다 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당시의 탄핵의 부당함이 밝혀지면서 1603년 3월에 낙안 군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604년 5월에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이 해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92위]에 책록되었다. 1607년[선조 40] 겸사복장에 제수되고, 1609년[광해군 1] 경상 좌수영 우후로 좌천되었다. 1611년 3월 경상 좌수영 우후를 사직하고, 귀향하여 덕동산 아래에 월곡 정사를 짓고 우거하였다.

[묘소]

1621년 11월 23일 월곡 정사에서 병사하였다. 1622년 1월에 성주부 동쪽 벌지산(伐智山)[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술좌(戌坐)에 장례를 지냈다.

[상훈과 추모]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1708년[숙종 34] 덕동 서원(德洞書院)을 건립하여 우배선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훼철된 후 1965년 낙동 서원(洛東書院)으로 개명하여 중건하였다. 2002년에는 낙동 서원 주변으로 역사 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 내에 월곡 역사 박물관과 우배선 동상, 유허비 등을 건립하였다. 우배선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화원 우배선 의병진 군공책(花園禹拜善義兵陣軍功冊)』[보물 제1334호]은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전공(戰功) 보고서로 임진왜란 때 대구 지방의 의병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우배선을 비롯하여 그 부하 의병 88명의 군공을 적고 있는데, 이들이 올린 전공은 참살 63명, 사살 604명, 작살 110명으로 작은 의병 부대로서의 전과로는 엄청난 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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