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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37
한자 衡平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배경]

개항기 신분이 해체되는 가운데 1894년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 했고, 이것이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의 법적 철폐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회 관습으로는 여전히 신분 차별이 지속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백정의 자제에 대해 학교 입학을 제한한다든가 해서 기회의 균등은 박탈되었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 차별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는 백정의 사회 활동이 펼쳐져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창립되었다.

[내용]

1923년 4월 형평사가 창립된 이래 1928년 4월까지 전국 67개소에 형평사 지사가 설립되었고, 1933년 8월에는 240여 개 지사가 설치되었다. 형평 운동이 전국적인 신분 해방 운동, 사회 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형평 운동에 반대하여 형평사나 사원을 공격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달성의 형평 운동]

1926년 조선 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의 백정 호구 수가 1,367호에 6,121명, 1934년 경상북도의 백정은 1,549호에 7,445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대구 달성 지역은 98호에 434명이었다. 1925년 무렵 달성에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가 설립되어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과 사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달성 형평 분사가 설립된 이래 백정에 대한 사회 차별이 이루어지는 반형평 운동이 수차례 발생하였다. 1925년 5월 달성군 하빈면 형평사원 심시국에 대한 학무 위원 이근수 외 5명이 면민을 선동해 일으킨 쇠고기 불매 운동이 있었다. 1925년 9월 2일 달성군 현풍 청년회 주최의 현풍 소년 웅변대회에서 행해진 형평사원 정기표의 강연 내용에 대한 현풍 농업 노동자들의 반발이 있었고, 그 반발은 형평사원에 대한 폭행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929년 5월 27일 달성군 구지면 창동에서 형평사원과 농민들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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