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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학교 학우단 폭탄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10
한자 新興學校 學友團 爆彈 事件
이칭/별칭 신흥 무관 학교 학우단 폭탄 사건,신흥 학우단 폭탄 사건,신흥 학우단 암살단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9월 18일연표보기 - 문상직 대구 잠입하여 서영균, 송정득 등을 포섭
종결 시기/일시 1920년 2월 12일연표보기 - 문상직, 서영균, 송정득 등 관공서 폭탄 제조 혐의로 체포
발단 시기/일시 1919년 8월 - 문상직 신흥 학우단 가입
발생|시작 장소 신흥 학우단 폭탄 사건 - 대구광역시
종결 장소 신흥 학우단 폭탄 사건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신흥 학우단|서영균|송정득|문상직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서영균, 송정득이 참여한 신흥학교 학우단이 펼친 독립운동.

[개설]

신흥학교 학우단의 정식 명칭은 신흥 학우단(新興學友團)이다. 신흥 학우단은 1913년 3월 만주 류허현[柳河縣] 산위안푸[三源堡] 다화셰[大花斜]에서 창설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주로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1913년 7월부터 국문 또는 국한문으로 발행한 기관지 『신흥 학우보』를 발행하였다. 1914년에는 퉁화현[通化縣]에 백서 농장(白西農場)을 설립하였다. 모교인 신흥 무관 학교가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으면서 졸업생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자 해체되었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가 되면서 작탄 투쟁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의해 독립운동의 중요한 방략으로 공인되었다.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군 조직이나 기타 무장 단체들은 독자적인 방면으로 활동하면서도 국내의 인적, 물적 기반을 활용하여 의열 투쟁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흥 학우단도 1919년부터 국내외 기반을 연계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신흥학교 학우단 폭탄 사건이다.

[경과]

1919년 8월 신흥 학우단에 가입한 문상직(文相直)은 류허현 고산자(孤山子)의 신흥 무관 학교 교실에서 김용만(金用萬)·김노원(金魯元)·김동산(金東山) 등 다른 7명의 단원들과 밀회하여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국내 잠입하여 주요 관공서를 폭파하고 고관을 암살하여, 한국인 관리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서 마침내 그 직무를 포기하도록 하여 독립을 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신흥 학우단은 국내 작탄 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폭탄 제조, 자금 조달, 국내 상황 시찰 등의 임무를 분담하였다. 문상직은 국내 사정 탐지와 동지 규합 임무 수행을 위해 국내에 진입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9년 9월 18일 대구에 잠입한 문상직은 달성군에 인접한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출신으로, 서영균(徐榮均), 송정득(宋貞得) 등을 포섭하였다. 그와 아울러 홍우제(洪于濟)를 만주 해룡현(海龍縣)에 있는 김용만에게 보내어 폭탄 반입을 교섭하게 하는 등 거사를 추진하였다. 특히 문상직, 서영균, 송정득은 폭탄 제조에 필요한 놋쇠 세공 장인을 찾고, 대구에서 관공서 폭파용 폭탄을 제조하여 조선인 관리 암살 계획을 추진하기로 뜻을 함께하였다.

[결과]

국내 외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던 경상북도 경찰부 제3부에 의해 1920년 2월 12일 서영균, 송정득, 문상직이 함께 체포되었다. 대구에서 관공서 폭파용 폭탄 제조한 혐의였다. 이 사건으로 서영균과 송정득은 1920년 2월 제령 보안법 총포 화약 단속 시행 규칙 위반으로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나, 1920년 6월 대구 지방 법원의 재판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반면, 문상직은 1920년 총포 화약류 위반 혐의 등으로 대구 지방 법원에서 5년형에 처해졌는데 감형되어 1924년 4월 14일에 형을 마치고 출감하였다.

1920년 2월 신흥 학우단을 포함한 암살단 사건 관련자 명단을 보면, 문백(文白), 문일구(文一球), 김춘배(金春培), 이을록(李乙錄), 문상직, 서영균, 서병일(徐丙日), 송정덕, 이순원(李淳元), 김용만, 김동산, 황대벽(黃大闢), 이박헌(李伯瀗), 주재기(朱載基), 김근홍(金根洪), 홍우제, 이남기(李南基), 박광(朴洸), 이기호(李祁鎬), 서상일(徐相日), 김사용(金思容) 등 총 21명이다. 출신 지역을 보면 서울시 1명, 의령군 2명, 고령군 2명, 대구시 6명[달성군 2명], 상주군 2명, 안동군 1명, 남원군 1명, 만주 지역 6명으로, 국내에서는 주로 경상북도 인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계 속에서 작탄 투쟁, 요인 암살 등이 활발히 시도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신흥 무관 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흥 학우단의 국내외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신흥 무관 학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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