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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622
한자 王建
영어공식명칭 Wang Geon
이칭/별칭 약천(若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손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918년 6월 - 왕건 고려 건국
활동 시기/일시 927년 - 왕건 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함
활동 시기/일시 935년 - 왕건 신라 고려에 항복
활동 시기/일시 936년 - 왕건 후백제 멸망시킴
성격 왕|건국자
성별 남성

[정의]

후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과 싸운 고려의 태조.

[개설]

왕건(王建)의 재위기간은 918년~943년이다. 자는 약천(若天)이며 송악(松岳)[지금 경기도 개성시] 사람이다.

[가계]

왕건은 그는 개성 일대에서 재력을 키운 아버지 왕륭의 절대적 도움을 받았고, 호족 출신인 왕륭의 힘으로 자연히 많은 호족세력을 거느릴 수 있었던 왕건은 탄탄한 배경을 기반으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지방호족의 딸들과 결혼정책을 통해 왕권을 다져나갔기 때문에 29명의 부인을 두기도 했다.

[활동 사항]

1. 후삼국 시기

898년 왕건은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에 광주, 충주, 청주 등 3개 주와 당성(唐城), 괴양(槐壤) 등 군, 현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왕건은 아찬 벼슬을 받았다. 903년 3월에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光州)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錦城郡)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현을 공격하여 이를 쟁취하였다. 이어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한 뒤 개선하였다. 또한 양주(良州) 장수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湌)으로 승진하였다. 906년 왕건은 정기장군 금식 등과 함께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을 공격하여 견훤과 여러 번 싸워서 이겼다. 909년 왕건은 나주지방 방비사업을 이유로 관등을 높여 한찬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913년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은 일단 자기 부하로 들어오면 부드럽게 대하면서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측근 인사들을 차근히 자기의 정치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2. 고려 건국

918년 6월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태조 왕건은 “이전 임금[궁예]은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여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다.(중략)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 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태조는 안으로는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했다.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궁예나 견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3. 공산전투와 후삼국 통일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920년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왕건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군대를 출동시켰다. 왕건은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왕건이 군대를 출동시켰다는 소식에 견훤은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왕건견훤은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대립하였다. 왕건은 정예의 기병 5천 명으로써 대구 동구의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왕건의 장수 김락신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왕건은 사실상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이때 왕건이 몸을 피신하며 이동한 불로-해안-안심-반야월 등의 경로는 현재까지도 대구 동구의 주요 지명으로 전한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왕건은 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다. 935년 10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았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지금 경상북도 구미시]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저술 및 작품]

태조 왕건은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정계』와 『계백료서』는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여겨지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묘소]

왕건의 묘소는 현재 북한 개성시에 있다.

[상훈과 추모]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원찰(願刹)로 지정한 앙암사(仰巖寺)에서는 고려시대 동안 태조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져 왔고 고려가 멸망한 후에도 태조의 영정이 보전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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