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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78
한자 蔡先吉
영어공식명칭 Chae Seongil
이칭/별칭 길중(吉仲),금탄(琴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9년연표보기 - 채선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채선길 공산의진군 참여
몰년 시기/일시 1646년 7월연표보기 - 채선길 사망
묘소|단소 채선길 묘소 - 대구광역시 북구 금단동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인천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으로 공산의진군에 참여한 문인 학자.

[가계]

채선길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길중(吉仲), 호는 금탄(琴灘)이다. 고려 중엽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蔡先茂)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채홍(蔡泓), 아버지는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신관(申寬)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연안김씨(延安金氏)로, 김희복(金希福)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행주은씨(幸州殷氏)로, 은진명(殷震鳴)의 딸이다.

[활동 사항]

채선길은 1569년(선조 2)에 태어났다. 집안은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7세 때 『효경』을 배운 뒤에 “효제(孝悌)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모가 부를 때는 대답을 반드시 공손하게 하고, 물러나 책을 읽을 때는 종일 게으르지 않았다. 이때 부친이 충(忠)·신(信)·성(誠)·경(敬) 4자를 써서 주었는데, 이는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1584년(선조 17)에 부친 채응린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행하였다. 이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나아가 『심경』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팔공산의진군(八公山義陣軍)을 일으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여러 아우들과 함께 수백 명 의병을 모집하여 팔공산에 진을 치는 등 모당 손처눌·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등과 함께 힘을 모았다.

1599년(선조 32)에 칠곡 사양(泗陽)에서 한강 정구를 종유하며 『근사록』을 배웠고,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와 함께 『춘추』삼전(三傳)을 강론하였다. 또 아우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과 함께 소유정(小有亭)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대구 부사로 부임하자, 정경세와 교유하며 강론과 토론을 즐겼다. 1614년(광해군 6)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구미 선산[지금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일건재(日乾齋)에서 강학을 하였다.

1636년(인조 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하 된 자로서 천명을 어찌 기다리고만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의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강(三綱)의 도리가 무너졌다.”고 탄식한 뒤에 호산(湖山)에 은거하여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646년(인조 24) 7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묘소]

채선길의 묘소는 대구부 북쪽 금단동(琴壇洞)[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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