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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71
한자 鄭光天[東區]
영어공식명칭 Jeong Gwangcheon
이칭/별칭 자회(子晦),낙애(洛涯),송파(松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3년 3월 17일연표보기 - 정광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정광천 팔공산 공산의진군 참여
몰년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 정광천 사망
출생지 정광천 출생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묘소|단소 정광천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연화리
사당|배향지 정광천 배향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동래
대표 관직|경력 공산의진군 하빈현 남면장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의 공산의진군에 참여하여 하빈현 남면장의 역할을 수행한 문인 학자.

[가계]

정광천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송파(松坡)이다. 고려 때 좌복야를 지낸 정목(鄭穆)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적개공신으로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진 정종(鄭種)이고, 할아버지는 정세검(鄭世儉), 아버지는 정사철(鄭師哲),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호연(李浩然)의 딸이다. 부인은 산화이씨(山花李氏)로, 이안인(李安仁)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익(鄭釴), 정기(鄭錡), 정집(鄭鏶), 정수(鄭鐩)이고, 딸은 양우원(楊遇元), 여득충(呂得忠)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정광천은 1553년(명종 8) 3월 17일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현 동곡리에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듣고 크게 깨달아 『소학』을 깊이 탐독하고, 또 염락관민(濂洛關閩)과 같은 성리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자득하였다. 한편 부친 정사철 및 연정(蓮亭) 서형(徐浻),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송재(松齋) 주신언(朱愼言)과 함께 팔공산을 유람했는데, 파계사, 정각소암(靜覺小庵), 삼성암(三聖庵), 광석대소암(廣石臺小庵), 염불암(念佛庵), 동화사 등지를 돌아보았다. 이때 「유팔공산십수(遊八公山十首)」라는 연작시를 남겼다. 다음은 그중 제7수인 「숙삼성암(宿三聖庵)」이다.

위봉직상박운청(危峰直上薄雲靑)[높은 봉우리 곧장 푸른 구름 위로 솟았으니]/절승하수대은병(絶勝何殊大隱屛)[뛰어난 승경 무이산 대은병과 무엇이 다른가]/

야입소암산적적(夜入小菴山寂寂)[밤에 작은 암자에 들어가니 산은 적막하고]/효종성단몽초성(曉鐘聲斷夢初醒)[새벽 종소리 끊어지자 꿈에서 막 깨어나네]

1586년(선조 19) 가을에 낙동강 동쪽 물가 ‘아금(牙琴)’이라는 바위에 누대를 짓고, 부친과 함께 생활하며 유유자적하였다. 1590년(선조 23)에 아버지 정사철이 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때마침 아버지 정사철의 회갑이었는데, 정성을 다해 회갑연을 준비하여 잔치를 열었으며, 특히 『연수곡(延壽曲)』 5곡을 지어 불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6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에서 지역의 인사들이 향회를 열어 대구지역 전역에 의병을 결성하였다. 이때 결성된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에 참여하여 하빈현 남면장(南面將)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지은 「술회가」 6수와 「병중술회가」 3수의 가사가 전하는데, 다음은 「술회가」 일부이다.

설울사 설울시고 민망함이 그지없다. /병진(兵塵)이 막막하니 갈길이 아득하다. /어느제 수복고국(收復故國)하여 군부(君父) 편케 하려뇨.

1594년(선조 27)에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니, 향년 42세였다.

[학문과 저술]

정광천은 『낙애일기』와 3권 1책의 『낙애집(洛涯集)』를 남겼다.

[묘소]

정광천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연화리 연화산(烟花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광천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의 금암서원(琴巖書院)에 부친 정사철과 함께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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