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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동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53
한자 徐思遠[東區]
영어공식명칭 Seo Sawon
이칭/별칭 행보(行甫),만오당(晩悟堂),고시자(顧諟子),낙재(樂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0년 6월 4일 - 서사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서사원 예조의 천거로 몽학교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서사원 팔공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594년 8월 - 서사원 청안 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서사원 선교랑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15년 - 서사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39년 10월 24일 - 서사원 이강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73년 - 서사원 구계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2008년 - 서사원 구암서원에 배향
출생지 서사원 출생지 - 경상북도 칠곡군
거주|이주지 서사원 은거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묘소|단소 서사원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사당|배향지 이강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277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구계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안뜸로47번길 28[분평동 251-5]
사당|배향지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지도보기
성격 의병장
성별 남성
본관 달성
대표 관직|경력 몽학교수|청안 현감|선교랑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하여 왜적에 맞서 싸운 임진왜란 의병장.

[개설]

서사원임진왜란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결성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또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모당 손처눌과 함께 지역의 유생을 모아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강학하여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가계]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이다.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낸 서진(徐晉)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서필(徐弼),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期), 아버지는 서흡(徐洽),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이익조(李益祖)의 딸이다. 부인은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박원형(朴元亨)의 후손이다. 박씨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서항(徐恒)이다.

[활동 사항]

서사원은 1550년(명종 5) 6월 4일에 팔거현(八莒縣)[지금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백부 서형(徐浻)에게 입양되었다. 1566년(명종 21) 17세 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70년(선조 3)에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듣고 퇴계 문하에 들지 못했음을 통탄하였다. 1575년(선조 8)에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고, 1577년(선조 10)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84년(선조 17) 예조의 천거로 몽학교수(蒙學敎授)에 제수되었고, 1587년(선조 20)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족을 데리고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으로 피신하였다. 1592년 6월 8일에 동화사(桐華寺)에 머무르면서 향병 모집을 독려하는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을 짓고, 여러 의병장과 의논하여 「향병입약(鄕兵立約)」을 제정하였다.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 지역의 인사들과 향회를 열어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하고, 7월 7일에 향병장, 면리장, 유사를 나누어 정하고 서사원 자신은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조모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부득이 향병장 역할을 손처눌에게 이관하였다. 1594년(선조 27) 8월에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면서 항쟁활동을 속개하였다. 1596년(선조 29) 정월에 선교랑에 제수되었고,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이끌고 병사(兵使)가 주둔해 있는 목천(木川)에 가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1597년(선조 30)에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을 지어 쌀과 콩 3백여 휘와 무명 한 동을 얻어 청도 오례성(五禮城)의 군량으로 사용하였고, 1597년 4월에는 군대를 이끌고 문경새재를 축성했다. 1599년(선조 32) 왜적이 완전히 철수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현(河濱縣) 이천(伊川)에 머물며 거처하는 곳을 ‘미락재(彌樂齋)’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미(彌)’자를 떼고 단지 ‘낙재(樂齋)’라고만 하였다. 이후 1600년(선조 33) 개령현감(開寧縣監)에, 1601년(선조 34) 옥과현감(玉果縣監)에, 1604년(선조 37) 연기현감(燕岐縣監)에, 1605년(선조 38) 호조정랑에, 1607년(선조 40) 형조좌랑에, 1609년(광해군 1) 동궁사어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학문과 저술]

서사원임진왜란 직후인 1592년(선조 25) 4월 12일부터 1595년(선조 28) 9월 20일까지 3년 5개월 동안의 일상을 기록한 『낙재선생일기』와 10권 4책의 『낙재집』이 있다.

[묘소]

서사원의 묘소는 대구부 서쪽 파산(巴山)[지금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있다.

[상훈과 추모]

서사원은 1639년(인조 17) 10월 24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배향되었고, 1673년(현종 14)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淸安)에 있는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2008년 대구유림의 총의에 의해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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