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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453
한자 崇禎處士 遺墟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for Sungcheongcheosa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29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86년 - 숭정처사 유허비 최동집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61년 - 숭정처사 유허비 최동집 사망
현 소재지 숭정처사 유허비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295 지도보기
원소재지 숭정처사 유허비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295
성격 유허비
관련 인물 최동집|최흥원|채제공|정시용
재질 석조
크기(높이, 너비, 두께) 높이 520㎝|폭 260㎝|두께 280㎝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는 조선후기 숭정처사 대암 최동집[1586~1661] 선생의 유허비.

[개설]

최동집[1586~1661]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이다. 아버지는 현령 최계(崔誡)이며 한강(寒岡)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병진 증광시(增廣試)에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고, 참봉에 제수되어 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정묘호란에는 의병을 규합하였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과 도의지교[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도덕이나 의리로 사귐]를 맺었다. 뒤에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농연(聾淵)가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최동집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을 했고, 이후에는 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말년에는 처사의 삶을 살았다.

백불암 최흥원최동집의 5세이다. 최흥원은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부인동 일대 주민을 위해 ‘부인동 동약’을 만들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건립 경위]

숭정처사 유허비최동집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최흥원이 세운 유허비이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연호로 최동집이 명나라가 망하자 대구광역시 동구 부인동 일대로 들어와 은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백불암 최흥원 선생이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에게 부탁해 비문을 짓고 정시용(鄭始容)이 글씨를 써서, 시냇가 자연석 바위에 새겼다.

[위치]

숭정처사 유허비 위치는 대구광역시 동구 부인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가면 팔공산기독연수원 옆 용수천변에 있다. 이곳에서 최동집농연서당을 건립하여 말년을 보내며 은거하였다. 농연서당은 1925년 7월 홍수로 파손된 것을 1930년에 현재 위치에서 약 500m 위쪽인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665-2번지로 옮겨 중건하였다. 정확한 주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295번지이다.

[형태]

숭정처사 유허비는 자연석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전면 중앙에 숭정처사 유허(崇禎處士遺墟)라 새기고, 왼쪽에 통판 정시용 서(通判鄭始容書)라고 새겼다. 뒷면에는 중앙에 홈을 파서 숭정처사 대암선생 최공 유허비명 병서(崇禎處士臺巖先生崔公遺墟碑銘竝序)라고 새겼다. 숭정처사 유허비 규모는 높이520㎝, 폭 260㎝, 두께 280㎝의 자연석이다.

[금석문]

앞면

숭정처사유허[崇禎處士遺墟].

뒷면

숭정처사대암선생최공유허비명병서[崇禎處士臺巖先生崔公遺墟碑銘竝序].

팔공산(八公山)이 영남(嶺南)에 이름이 드러나 초목과 구름과 안개가 드러나게 특이한 기운이 있는 것은 어찌 은일(隱逸)하는 군자(君子)가 그 속에서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 군자(君子)는 누구인가? 사부(師傅) 최공이 바로 이 분이다. 공의 이름은 동집(東㠍), 자(字)는 진중(鎭仲)이고 대암(臺巖)은 호(號)이다.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학문하는 요결(要訣)을 들었다. 물러나서는 한 시대의 여러 명유(名儒)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분(交分)을 맺어 성인(聖人)의 글이 아니면 강마(講磨)하지 않았으니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독실함과 공부의 세밀함을 알 수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 생원(生員)으로서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교유하기를 청했으나 드디어 소매를 뿌리치고 고개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분수에 만족하며 배고픔을 잊었다.

인조(仁祖) 기묘년(1639)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 효종(孝宗)이 대군(大君)으로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인질(人質)로 갈 때 공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하였다. 공이 그 명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조정에 나아갔으나 길이 멀어 대군의 행차에 미치지 못하여 교체되어 통곡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신년(1644)에 명나라가 망하자 드디어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 농연(聾淵)의 수석(水石)이 좋은 곳에 초가(草家)를 짓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5세손 전(前) 익찬(翊贊) 흥원(興遠)씨가 공의 유적(遺蹟)이 없어질까 두려워서 농연(聾淵)의 옛 터에 다시 몇 칸의 집을 짓고 여러 자제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독서하여 이름난 조상의 구업(舊業)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그래도 흡족하지 않다고 여기고, 작은 집은 흥폐(興廢)가 무상(無常)한 것이니 오래 갈 수 없고 오래 가기 위해서는 돌을 세움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곧 제공(濟恭)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공의 사적(事蹟)이 매우 자세하였다. 그 끝에 이르기를, “훌륭하지도 않은 것을 칭찬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 훌륭한 행의(行義)가 있는데도 칭찬하지 않음은 어질지 못함이니 원하옵건대 귀하(貴下)께서는 우리 선조의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지어 후생(後生)들로 하여금 어질지 못한 사람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제공(濟恭)이 손을 씻고 읽고서는 탄복하여 말하기를, “요동(遼東)의 심양(瀋陽)으로 대군(大君)을 따라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다. 처자(妻子)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형세를 살피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공은 홀로 용감하게 즐거운 땅에 나아가듯 하였다. 이윽고 대군 행차에 미치지 못하여 교체되었을 때에는 북쪽을 바라보며 크게 통곡했으니 이것은 춘추(春秋)시대의 개자추(介子推)가 진문공(晉文公)의 망명(亡命)에 말고삐를 잡고 다닌 정성과 같다.

갑신년 이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세상이 되어 의관과 문물이 오랑캐의 문화로 변하자 공은 필부(匹夫)의 몸으로 이미 세상에 할 일이 없게 되어 마침내 멀리 세상을 피해 숨고 오직 입산한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니 이것은 제(齊)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의 방자한 정치에 반대하여 동해(東海)를 밟은 기풍(氣風)과 같다.

공의 충의와 대절(大節)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밝게 비추어져 지금까지 칭찬의 말이 어제의 일처럼 되었으니 공의 충의를 썩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비석이 아니겠는가? 비록 익찬공(翊贊公)이 효성에 독실하여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오래되어도 게을리 하지 않아 선조의 덕행(德行)을 현양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제공(濟恭)이 어찌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명(銘)을 붙인다.

팔공산 정상에 해와 달이 높게 비치도다. /공의 마음 여기에 있어 용연의 돌처럼 굳건하시네. /물은 천고토록 이어지니 공의 이름도 이와 더불어 가리라./ 저 짧은 비갈에 어찌 경중을 모두 말하리오. /오직 후손들의 정성이 한없이 넓고 크니, /귀신들이 보호 유지하여 숨은 은덕 빛나게 하리라. //

[八公山著名嶺以南. 草木雲煙奕奕有異氣者. 豈不以隱君子嘗棲遯於其中歟. 君子爲誰. 師傅崔公是也. 公諱東㠍. 字鎭仲. 臺巖其號. 早遊寒岡鄭先生門. 聞爲學之訣. 退而與一代諸名儒. 結道義之交. 非聖人書. 不與之講劘. 其爲己之篤. 用工之密. 可知也. 當光海世. 以上舍生遊太學. 賊臣爾瞻要與交. 遂拂袖踰大嶺以歸. 囂囂然樂以忘飢. 及仁祖己卯. 用逸薦除陵署郞. 明年. 孝廟以大君. 再質瀋陽. 拜公爲師傅. 公聞命立趣駕赴朝道. 踔遠不及而遞. 痛哭還舊里. 甲申. 大明亡. 遂入八公山. 結廬聾淵水石間不復出. 公歿百有餘年. 五世孫前翊贊興遠甫愳公遺蹟蕪沒. 就淵上舊址. 重立若干楹. 使羣子弟讀書其中. 無墜名祖業. 猶且曰未也. 老屋子興廢無常. 不可以久遠圖. 久遠宜莫如立石. 卽書抵濟恭. 敍公事頗詳. 末乃曰. 無美而稱. 誣也. 有美而不稱. 不仁也. 願吾子銘吾祖墟. 使後孫不至爲不仁也. 濟恭盥手讀歎曰. 夫遼瀋羈紲. 旄丘瑣尾之役也. 顧妻子語刺刺者. 鮮有不左右顧望. 而公獨勇赴如樂地. 旣不及焉. 則北望哭失聲. 此介推執靮之誠也. 甲申以來. 天地崩坼. 衣冠化爲腥羶. 公以匹夫之身. 旣不可有爲於世. 則卒乃遐擧遠引. 惟恐入山之不深. 此魯連蹈海之風也. 公之忠義大節. 赫赫然照人耳目. 式至今稱說如前日事. 其可以不朽公者. 石云乎哉. 雖然. 翊贊公孝於篤. 僾然追先. 愈久而愈不敢懈. 欲有以顯揚先德. 靡不用其極. 濟恭安得不感服於斯乎. 遂樂爲之銘. 銘曰 八公之頂, 日月高臨. 公心在玆, 聾淵之石. 水續千古, 公名與之. 彼短者碣, 豈曰重輕. 維後孫誠, 茫茫浩刦. 鬼護神持, 潛德之輝.]

[현황]

숭정처사 유허비는 별도의 보호 시설 없이 하천 옆에 있다.

[의의와 평가]

숭정처사 유허비는 자연석 비석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크기 금석문일 뿐 아니라 규모상 팔공산 일대에서 가장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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