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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연대 사건[동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35
한자 大邱六聯隊事件[東區]
영어공식명칭 Daegu Six Regiment Affair
이칭/별칭 대구반란,대구 6연대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8년 12월연표보기 - 대구 6연대 사건 발생
성격 사건

[정의]

1948년 12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발생한 대구 주둔 6연대 사건.

[개설]

대구 6연대 사건[일명 대구 육연대 사건]은 1948년 11월 2일부터 1949년 1월 3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6연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팔공산은 대구 6연대 제2차 사건과 관련되었다. ‘대구 6연대 제2차 사건’이란 1948년 12월 6일 여순사건 진압 작전 후 복귀하던 6연대 소속 병력 가운데 좌익 성향인 이상백 상사를 비롯한 28명의 하사관과 14명의 병사들이 숙군(肅軍)[대한민국 국군이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실시한 군부 숙청]을 두려워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으로 들어간 사건을 말한다. 또한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서도 대구 6연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구 6연대제1차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48년 11월 2일 반군 백여 명이 수성[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방면에서 신천동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1948년 11월 2일 오후 3시 무렵 신천교를 지나던 대구 소방서 소속 소방차 3대를 납치하였다. 이때 교전으로 신천동의 남녀 학생과 어린이 수 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고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 반군 중 일부가 달성동[지금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부근에서 시내로 진격하려다가 경찰 부대의 반격으로 칠곡[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일부와 경상북도 칠곡군] 방면으로 달아나면서 도중에 있는 칠곡·동명[지금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가산[지금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등 세 곳 지서를 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1948년 11월 3일 오전 7시 무렵에 칠곡·동명·가산 지서를 빠져나와 피신하였다. 이처럼 대구 시내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각 학교를 휴교하고 은행과 회사는 1948년 11월 4일까지 휴무에 들어갔다.

[역사적 배경]

대구 6연대는 미군정기 군정의 경찰예비대의 성격의 가지고 만들어졌다. 미군정하 전국 각 주요 지역에 중대 규모로 창설되었다가 점차 규모가 커져 대대로, 더 나아가 연대로 확대되었다. 대구 6연대는 1946년 2월 18일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창설 때부터 6연대는 좌익계가 장악했으며, 제4연대와 함께 좌익 세력이 가장 강한 연대였다. 대구 6연대 사건은 1948년 11월 2일 6연대 내 좌익계 곽종진 특무상사가 자신을 연행하러 온 헌병대의 조장필 소위를 권총으로 사살하면서 시작되었다.

[경과]

대구 6연대 중 좌익 성향을 가진 군인들의 팔공산 입산은 1948년 12월 7일에 이루어졌다. 1948년 12월 7일 새벽 2시 무렵 여순 사건 이후 복귀하던 새벽 이동백 상사 진영의 낙동강 도강 모습이 진압 나온 6연대 병력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압군이 이동백 상사 진영을 향해 총격을 가하자 이동백 상사 진영은 낙동강을 건너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결과]

팔공산에 들어간 이동백 상사 진영은 일정 기간 팔공산을 배경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대구 6연대 사건은 제주4·3항쟁, 여순사건의 연장선상에 일어난 사건이며, 군대 내 좌익의 진출 상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대구 6연대 사건 이후 군대 내 좌익은 상당 부분 숙청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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