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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01
한자 三一運動[東區]
영어공식명칭 Samil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이칭/별칭 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4월 -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민족적 항일운동에 부응해 일어난 만세독립운동
3.1운동 - 조선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일어난 만세독립운동.

[3·1운동의 국내외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일제는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민족동화정책을 기조로 한 식민지배정책을 폭압적으로 실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여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키고 소작 조건을 악화시킴으로써 자소작농을 몰락시켰다. 또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내로 유입되는 일본자본을 막고, 다른 한편 조선의 민족자본이 형성되는 데 방해하였다.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은 점차 깊게 쌓여 갔다.

1910년대 후반 국제사회의 변동이 크게 발생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전후문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패전국의 식민지의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또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현실적 사회주의가 등장하여 세계의 구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대 구도로 재편해 나갔다. 러시아는 혁명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 있어 주요 과제는 민족해방이며, 이를 위해 러시아가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 갔다.

3.1운동을 촉발하는 움직임은 국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에서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를 채택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집필은 조소앙이 맡았으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참여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외교론이 반영된 다른 독립선언서와 달리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선언을 천명하였다. 이어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일제를 향한 혈전을 선포한다.”는 내용을 담은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동구의 3·1운동]

1910년대 국외 정세와 국외 독립선언서 발표로 자극을 받은 국내에서 만세시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준비과정을 거쳐 3·1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으며,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 확산되었다. 대구광역시[옛날 대구부]에서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독립의지를 만세계에 표방하였다. 이후 만세운동은 대구광역시 인근으로 빠르고 전파되어 나갔고, 동시에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도 1919년 3월 30일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 소속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남문밖시장 만세시위 운동, 1919년 4월 26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인천채씨 동족부락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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