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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288
한자 先史[東區]
영어공식명칭 Pre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선사/석기,선사/청동기
집필자 주보돈

[정의]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유적과 유물.

[석기시대]

대구광역시를 구성하고 있는 8개 군구(郡區) 가운데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 동구(東區)이다. 대구광역시는 북쪽으로 팔공산(八公山)을, 남쪽으로는 비슬산(琵瑟山)을 최고봉으로 해서 작은 산맥이 이루어져 이들이 동서 방향으로 달리면서 안팎을 가름으로써 마치 남북을 가로막은 병풍과 같은 형세를 한 분지지형이다. 분지의 약간 북쪽에 치우쳐서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발원한 금호강(錦湖江)의 물줄기가 동쪽에서 서쪽 방면으로 흘러가 마침내 서쪽 끝자락에서 낙동강의 본류와 합류한다. 대구분지의 동편에는 낮은 구릉이 드문드문 이어지면서 경상북도 경산시(慶山市)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고령군(高靈郡)과 접속한다. 남쪽으로는 비슬산 너머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북쪽으로는 팔공산 너머 군위군(軍威郡)과 경계를 이룬다.

대구광역시 동구는 대체로 그와 같은 형세의 대구분지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경역의 대부분은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남안(南岸)과 북안(北岸)에 분포되어있다. 남안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나 북안에 비해 면적과 행정 동(洞)의 수가 약간 적다. 동구는 팔공산과 그로부터 나온 몇몇 지맥(地脈)을 배경으로 각지에 형성된 곡간(谷間)[하천이 흐르는 골짜기]과 금호강을 중심으로 남북 두 유역에 펼쳐진 평지와 낮은 구릉(丘陵)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와 같은 지리 지세(地勢)를 이루고 있는 동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은 현재 고고자료만으로는 특정(特定)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다만,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月城洞)이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巴洞) 등 대구분지의 몇몇 지점에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동구 지역도 자연환경이 비슷하였을 터이므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동쪽의 대구광역시 동구 대림동(大林洞)이나 대구광역시 동구 사복동(司福洞) 등의 수혈(竪穴)[구덩이] 유구에서 빗살문토기편이 출토된 사실로 미루어, 늦어도 신석기 시대부터는 동구에도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은 확실시되고 있다. 전반적 추세로 볼 때 대구광역시 동구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은 팔공산 쪽 곡간보다도 주로 금호강변을 중심으로 한 강가[수변(水邊)]에서 생활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신석기 유적이 대구분지 전반에 산재한 점으로 미루어 이 무렵 사람들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 갖추어졌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고고자료가 보여주는 양상으로 미루어 신석기 시대부터 동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더라도 그 수가 그리 많았을 것 같지 않다.

[청동기 시대]

사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밀집해서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동기 단계에 들어와서이다. 대구분지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흘러 금호강과 합류하는 신천(新川)의 주변 일대나 서쪽의 진천천(辰泉川)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인돌은 그런 양상을 잘 보여 준다. 동구에서는 현재 남은 고인돌의 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鳳舞洞), 백안동(百安洞), 미곡동(米谷洞), 율암동(栗岩洞), 동내동(東內洞), 각산동(角山洞) 등지에 약간씩 흩어져 분포한다. 그 밖에 이 무렵 집자리나 선돌[입석(立石)]을 비롯한 생활의 흔적들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대구광역시 동구 동천동 유적에서는 작물을 경작(耕作)한 실상을 보여주는 유구까지 확인되었다. 적지 않은 주민들이 금호강 주변의 곳곳에 정착하여 취락을 이루었음을 증명해 준다.

취락이 형성되고 또 개인의 분묘인 고인돌이 일정한 지역에 집단을 이루어 조성된 사실은 내부적으로 계급의 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아직 본격적 수준은 아니겠지만 지석묘를 조영할 수 있는 상층 계급이 혈연적 기반 속에서 정치성을 띠기 시작하였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후 생산력이 향상되고 그에 걸맞게 계급 분화가 진전되면서 정치성은 한층 더 짙어져 갔다. 이런 성격의 몇몇 집단이 서로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뒷날 초기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읍락(邑落)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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