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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선거반대 시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16
한자 五十 選擧反對 示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 5·10 선거반대 시위
성격 정치운동

[정의]

1948년 대구에서 발생한 5·10선거 반대 시위.

[역사적 배경]

1948년 3월 3일에 행정명령 제13호에 의하여 선거위원회의 권한을 부여받는 국회선거위원회가 조직되고, 3월 13일에 남녀평등의 보통선거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선거공보 제1호가 공포되었다. 대구는 3개의 선거구로 편성되었고, 대구와 경북 선거를 총괄할 선거 사무국은 경찰청 내에 설치되었으며, 선거 사무국 국장은 도공보실장이 맡았다.

[경과]

1948년 5·10선거에서 선거 등록을 방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1948년 2월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이 펼쳐질 때, 대구에서는 근로인민당·민주독립당·건국청년회·통일독립운동 경북협의회 등과 일부 학생들이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8년 4월 16일에 국회위원 입후보 등록이 마감되었다. 5월 5일 대구 을구에 출마한 한국민주당서상일(徐相日)은 청년들에게 권총 습격을 받았으나 무사하였고, 비서가 총상을 입었다. 5월 6일 대구와 경북 도내에서 선거 반대와 남북협상 지지 현수막이 내걸렸다. 또 대구 내 3개 대학교와 6개 중등학교가 맹휴를 벌였다. 5월 7일 초등학교에 파급되어 7개 초등학교가 사실상 수업이 중단되었다. 실제로, 대구의 10여 개 학교에서 5·10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교원들이 철교 투쟁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원 40여 명이 검거되었다. 또 일부 기업에서는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노동 파업이 발생하였다.

[결과]

5·10선거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5·10선거는 치러져, 갑구 최윤동(崔允東)[한국민주당]·을구 서상일(徐相日)[한국민주당]·병구 백남채(白南採)[한국민주당] 등 3명이 당선하였다. 당선자 모두 한국민주당 입후보자였다.

[의의와 평가]

5·10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평등 보통선거제에 의한 근대 선거로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바탕이 되는 선거였으나, 단독선거로 치러졌기에 통일 국민국가를 기대하였던 사람들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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