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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94
한자 六月民主抗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87년 1월 14일 - 6월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6월 10일연표보기 - 6월민주항쟁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7년 7월 9일 - 6월민주항쟁 이한열열사 장례식 이후 시위는 소강
발생|시작 장소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 전국
성격 시민운동

[정의]

1987년 6월에 박종철 고문치사 책임 규명과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철폐 및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며 진행된 국민운동.

[개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이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던 박종운의 행적을 취조하기 위하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주교정의사제구현전국사제단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면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여기에 1987년 4월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 선언’이 발표되자 정권의 폭력성에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1987년 6월 10일에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류탄에 피격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런 배경은 군부독재의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각계각층이 참여한 6월민주항쟁의 중심에는 1987년 5월 2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에서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있었다. 대구는 5월 25일 천주교죽전교회에 지역 민주 인사들이 모여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7년 5월 27일에 전국 단위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자 대구·경북본부도 이름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이하 국민운동대경본부]로 바꾸었다. 국민운동대경본부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민주당 등의 야당 인사뿐 아니라 민통련경북지부, 가톨릭노동청년회대구교구연합회, 가톨릭농민회대구교구연합회, 가톨릭농민회안동교구연합회, 경북기독교농민회, 경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경북지부, 우리문화연구회, 천주교 대구대교구사회운동협의회, 천주교안동교구정의평화위원회, 포항민주화운동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대구인권위원회 등의 단체가 참가하였다.

국민운동대경본부6월민주항쟁을 이끌어 나갔다. 대구에서도 국민운동대경본부가 주최한 집회와 시위에 대구 지역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참가하여 반독재 민주화 의지를 표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을 폭력적으로 제압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를 저지하였다. 그 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 문제와 더불어 30년 동안 지속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었다.

[경과]

6월민주항쟁은 대구 지역에서도 대구 동성로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대구 6월민주항쟁의 시작은 6·10 국민대회였다.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가 계획되자 전국적으로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대구에서도 6월 10일에 시민과 학생이 시내 곳곳에서 ‘호헌 철폐’와 ‘박종철 살인 진상규명’을 외쳤다. 대구에서 매일 진행된 항쟁은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부터 본격적인 범국민대회의 성격으로 진행되었는데, 6월 18일 밤늦게까지 2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6월민주항쟁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계기로 절정에 달하였다. 대구에서도 다음 날인 27일 새벽까지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고 1만 명 이상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며 차기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직선제 개헌, 언론 자유, 신체권 보장 등의 헌법 개정을 포함한 선언이 발표되자 투쟁의 열기는 일딘락되었다. 7월 9일에 국민운동대경본부대구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주최로 열린 ‘이한열 열사 영결식 및 추도 행진’에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대구 민주주의의 상징인 2·28기념탑까지 행진하였다.

[결과]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대통령직선제를 획득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가져왔고, 각 계층의 시민이 6월민주항쟁에 참여하여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게 됨에 따라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농민 집회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6월민주항쟁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고, 다양한 계층·계급이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면서 이후 대중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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