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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50
한자 大邱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0년 1월연표보기 - 대구청년회 창립
개칭 시기/일시 1927년 7월 - 대구청년회에서 대구청년동맹으로 개편
성격 청년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창립한 청년 단체.

[개설]

대구청년회(大邱靑年會)는 1920년 1월 신학문을 수학한 신흥 청년 지식인층과 신흥 경제인 및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대구 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이다. 1920년대 전반에는 문화 운동의 최고 기관을 표방하였고, 1920년대 후반에는 청년운동의 전 조선적 운동으로의 전환을 표방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청년회는 1920년 1월 창립 당시 “신문명·신지식 수양의 최고 기관”을 표방하고, “문화 발전 사명을 가진 대구청년회”를 내세우는 동시에 ‘덕성 함양’과 ‘지식 교환’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 신문화 건설, 실력 양성, 자아 개조, 교육 진흥 등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 대구청년회 창립에 대하여 언론은 “대구는 남선(南鮮)의 수부요, 청년 사회의 중심인 고로 남선을 개발하고 사회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대구청년회를 조직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변천]

대구청년회는 1927년 7월에 결성된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의 가맹 단체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청년회는 신문화 건설과 자아 개조를 위하여 강연회, 웅변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청년회의 선전 활동도 함께 펼쳤다. 교육 진흥과 실력 양성을 위하여서는 대성학관(大成學館), 교남학교(嶠南學校),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등 사립학교를 후원하고,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大邱女子高等普通學校)[현 경북여자고등학교] 설립을 위한 교육 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와 별도로 경북청년연합회(慶北靑年聯合會) 결성을 추진하다 중단되기도 하였다.

대구청년회는 1923년 대구의 대중운동 단체, 언론기관과 연합하여 ‘단주금연토산장려 선전강연 연합대회(斷酒禁煙土産奬勵宣傳講筵聯合大會)’를 열고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에 대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 또 지역의 다양한 계층의 유지들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 대구지방부’를 구성하여 민립대학 설립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대구청년회는 1923년 언론으로부터 “가판(架板)보다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만큼 활동력이 떨어졌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의 창립 이후 대구청년회도 계급 강조의 청년운동에 영향을 받아 혁신 총회를 열고 회장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고, 회원 자격 연령을 18세에서 30세 미만으로 규정하면서 변화를 꾀하였다. 대구청년회는 1926년부터 대구 청년운동 선상에 나타난 합동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다.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의 “무산(無産) 청년에서 전 민족적 청년으로”라는 운동 방침에 영향을 받아 1927년 6월 대구청년동맹[이전 대구제4청년회], 대구무산청년회 등과 함께 전격적으로 ‘합동전권위원회(合同全權委員會)’를 구성하였다. 대구청년회가 가입한 합동전권위원회는 1927년 7월 24일 ‘대구청년단체합동총회’를 열어 대구 단일 청년 조직인 대구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대구청년동맹경북청년연맹의 결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의의와 평가]

대구청년회는 1920년 1월 신문화 수양 기관을 표방하고 창립된 이래 조선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대 중반 혁신을 통하여 청년운동의 전 조선적 운동 방침을 수행하였다. 또한 대구청년동맹에 이어 경북청년연맹의 결성에 참여하면서 신간회 운동의 확대 및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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