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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007
한자 三共油脂
영어공식명칭 Samgong-yuji
이칭/별칭 삼공합작회사,삼공유지합자회사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남로31길 6[칠성동2가 530-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노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9년 1월연표보기 - 삼공유지합작사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53년 12월연표보기 - 삼공유지합작사에서 삼공화학공업합작사로 개칭
해체 시기/일시 1958년 11월연표보기 - 삼공화학공업합작사 해체
최초 설립지 삼공합작사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남로31길 6 지도보기
성격 제조업체
설립자 김성곤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 있었던 비누 제조업체.

[개설]

1939년 칠성동에서 일본인 마쓰다[松田]가 운영하다가 경영난으로 도산한 기업을 곽모 씨가 인수하였지만 다시 경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은 비누공장을 대구고보 동창생인 김성곤, 최재영, 이종건이 인수하여 공동으로 삼공유지합작사를 설립하였으며, 김성곤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설립 목적]

성곡 김성곤은 보성학교를 졸업한 후 공무원과 은행원 일을 하였지만 기업가가 더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제조업에 관심을 가졌다. 김성곤은 아무리 유리하다고 해도 소규모 거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국민의 생필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생필품 중에서도 비누가 수요가 클 뿐 아니라 전시 통제경제하에서도 원료만 확보하면 사업 전망이 좋다고 생각하고 비누 제조업을 선택하였다.

[변천]

김성곤은 1939년 여름에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하여 13개월 간의 은행원 생활을 마치고, 곽모 씨가 인수하였으나 원료를 공급받지 못하여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하던 비누공장을 인수하였다. 김성곤대구고보 동창생인 최재영, 이종건과 공동으로 삼공유지합작사를 설립하였으며, 김성곤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삼공’이란 이름은 3인이 공동 투자하였다는 의미로 지었다.

공장의 위치는 대구역 뒤 기관사 사무소 옆 북구 칠성동 531번지였다. 최재호와 이종건은 각각 7,000원씩 출자하였지만 회사에 관심이 없어 얼마 후에 투자분을 회수하여 갔기 때문에 김성곤은 처가의 보조와 은행 융자로 자금 문제를 해결하였다.

1931년에 일제는 중요 산업 통제령을 발표하였으며, 만주사변을 도발하는 등 대륙 침략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생활필수품인 비누 제조업은 원료만 구할 수 있으면 전망이 좋은 업종이었고, 각종 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전시 통제경제하에서는 모든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부족하여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값싼 세탁비누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대구의 유일한 비누 제조업체인 삼공유지는 값이 싼 까만색 빨래비누만을 생산하였으므로 잘 팔렸다.

사업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김성곤 부부는 공장에서 10여 명의 종업원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김성곤이 직접 자전거를 이용하여 상품을 배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점차 확대되면서 세탁비누도 통제품으로 지정되었다. 자유 판매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제조업자는 제조품의 일부를 처분할 수 있었으므로 비누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원료의 비축에 성공하고 종래에 폐기되었던 부산물을 활용함으로써 경영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비누를 떠내고 난 뒤 가마솥 밑에 남는 찌꺼기가 물비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서민들은 새벽부터 삼공유지 앞에 양동이나 양재기를 들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삼공유지는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에 부산물도 많았으며,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성곡은 물비누로 돈을 번 지방 신흥 기업인으로 알려졌다.

1945년 해방은 삼공유지의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 경영상의 혼란으로 비누 제조업은 거의 가동되지 않았으며, 수입도 되지 않아 삼공표 세탁비누는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삼공유지는 일제 말기에 만주산 콩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비누 제조업에서 공정가격·배급제가 해제되면서 삼공유지는 크게 번창하였다.

삼공유지에서 성공한 김성곤은 1945년 10월에 『영남일보』를 창간하고, 1947년 대구에서 고려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발기인에 참가하여 1948년에는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8년 10월에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주식회사의 부지 일부를 빌려 자본금 1억 원으로 금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성곡은 제2차대전 말기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로 소개하여 둔 면방직기와 면직기가 영등포와 안양역에 노적되어 있는 것을 알고 미군정청에 신청하여 불하를 받았다. 그러나 부품이 빠져 있고 기능공을 구하기가 어려워 어려움을 겪었으나 삼공합자회사의 송금으로 대규모 방직공장을 설립할 수 있었다.

금성방직이 궤도에 오르자 성곡은 삼공합작회사를 처남인 윤정엽 지배인에게 넘기고 경영에서 손을 떼었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삼공유지는 징발되어 군용 비누를 생산하게 되었다. 1952년 3월 비누의 원료인 고래기름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고온으로 끓이다가 화재가 발생하면서 창고에 보관한 페인트 제조기까지 전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공은 많은 사채를 지게 되었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품 생산의 다양화를 통하여 1953년 12월에 상호를 삼공화학공업합작사로 변경하면서 윤정엽 사장이 대표이사가 되었지만, 누적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1958년 회사의 부지와 건물은 채권자에게 넘어갔고, 11월에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삼공유지의 주요 사업은 비누 제조이다.

[의의와 평가]

삼공유지로 통칭되었던 삼공합작회사는 대구에서 성장한 기업으로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엇다. 일본인이 거의 독점하고 있던 일제강점기하의 비누 제조업계에서 한국인 회사로서 크게 성공한 하나의 사례이다. 삼공유지를 통하여 자본을 축적한 김성곤이 대규모 면방직공장을 설립하고 궤도에 오른 것은 삼공합작회사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공유지는 그 후 경영자가 바뀌고 해산되었으나, 민족의 수난기와 혼란기에 생성·발전하여 금성방직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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