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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004
한자 慶北大學校 民靑學聯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3년 11월 5일연표보기 - 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74년 3월 21일 - 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
발생|시작 장소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지도보기
종결 장소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지도보기
성격 학생운동
관련 인물/단체 여정남|이강철|임규영|황철식|이광하|장성백|강기룡|윤규한|김진규|유진숙|조태수|김시형|이승룡|최재룡|강동균|한국풍속연구회|정진회|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정의]

반유신 운동을 전개하던 대구의 경북대학교 학생운동권을 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연루시켜 긴급조치 제4호 위반으로 구속한 사건.

[개설]

이른바 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은 1973년 11월 5일과 1974년 3월 21일의 반유신 시위와 관련이 있다.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는 이념 서클 한국풍속연구회와 한국풍속연구회 전신 서클인 정진회 회원 정화영[정치학과 67] 등이 준비하였다. 1973년 11월 5일의 반유신 시위에서는 경북대학교 학생 200~300명이 스크럼을 짠 채 학교 후문을 나가 경상북도 도청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전국 대학 운동권은 반유신 시위를 강력하게 전개하기 위한 연대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73년 말부터 1974년 3월까지 각 지역 대학 대표들이 회합을 가졌다. 수차례 모임에서 나온 결론은 조직과 선언문의 명칭은 각 대학의 조건에 맞추고, 각 대학별로 예비 시위를 조직하여 1974년 4월 초에 일제히 반유신 시위를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대학 대표 모임의 성격은 반유신 시위의 내용과 형식 등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학 자체의 결정을 존중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이 주장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은 실재하는 조직도, 합의된 조직도 아니었다. 1974년 4월 3일의 반유신 유인물에 등장하는 ‘민청학련’ 명칭은 이념 서클을 기반으로 하는 전국 대학 네트워크에 대하여 몇 개 대학의 학생들이 합의한 것이다. 이른바 민청학련은 박정희 정권에게 학생들의 반유신 세력이 더 강력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4년 3월 초에 전국 대학 모임에서 1974년의 첫 번째 반유신 시위를 지원한 대학이 경북대학교였다. 전국 대학 모임에서 3월 21일 ‘경북대 반유신 시위’ 이후 3월 28일 서강대학교의 시위를 시작으로 서울 지역 대학 동시 시위를 진행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명의로 제작된 ‘민중·민족·민주선언’과 ‘민중의 소리’ 선언문이 뿌려지면서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일제히 전개되었다. 각 대학은 각자의 반유신 조직의 명칭으로 선언문을 작성하였는데, 4월 3일에 배포된 유인물에 처음으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칭이 등장하였다.

1974년 4월 3일 밤 10시에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4월 3일의 반유신 시위와 연루시켰다.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조작되어 긴급조치 제4호 위반자로 구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체제를 선포한 후 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수립 후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던 대학 내의 이념 서클들을 반국가단체, 사회주의 사상단체 등으로 조작하여 많은 학생을 구속하는 등 학생운동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다. 정권에 의한 철저한 학원 통제와 감시를 뚫고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의 첫 반유신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서 반유신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과]

경북대학교의 1974년 3월 21일 반유신 시위 주동자는 당일 대부분 검거되었다. 검거되지 않았던 임규영과 정화영도 며칠 만에 피신처에서 검거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중앙정보국 6국 부국장과 간부들이 내려와서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후 서울에서 시위가 연이어 발생하자 조사를 받던 경북대학교 학생 중에서 선별된 12명은 3월 31일에 서울구치소로 압송되었다.

[결과]

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는 총 16명이다. 이강철·정화영·임규영이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황철식·이광하·장성백·강기룡·윤규한·김진규는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여정남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과 관련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뒤 1975년 4월 9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적절한 배상이 필요하다”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대법원은 2013년에 “긴급조치 제4호가 기본권의 본질적인 요소를 침해하였다”라고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의 본질을 폭로한 경북대학교 민청학련 사건은 1970년대의 반독재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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